틸다 스윈튼은 '에이다 러블레이스' '콘스탄틴' '마이클 클레이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케빈에 대하여' '설국열차' '닥터 스트레인지' '옥자' '서스페리아' '프렌치 디스패치' 등 매 작품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넘나들며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명실상부 최고의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국내 영화 팬들에게는 '옥자' '설국열차' 등 봉준호 감독과의 협업으로 높은 신뢰감과 인지도를 쌓았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웨스 앤더슨, 루카 구아다니노, 짐 자무쉬 등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호흡을 맞춰 온 틸다 스윈튼이 마침내 세계적인 거장 조지 밀러 감독과 만난 '3000년의 기다림'에서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서사학자로 변신했다.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만, 그 밖에는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성적인 서사학자 알리테아. 그는 가족도, 욕망도 없이 홀로 지내는 삶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우연히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갈망을 일깨우는 정령 지니를 만난다.
현실과 초현실, 기억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현된 조지 밀러의 세계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그의 세계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틸타 스윈튼이 답했다. 다음은 영화사에서 제공한 일문일답.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없다"
▷ 출연을 결심하게 만든 '3000년의 기다림'만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야기 초반이 감독님이 만들고 싶어 하던 장면이었고, 전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감독님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는 모든 게 기존 작품과는 다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분위기도 비슷하고 똑같이 판타지에 초점을 둔 영화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같았다.
▷ 직접 연기하고 겪은 알리테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려고 매우 애쓴다. 알리테아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고 사랑 이야기 같은 것들을 통해 감정을 찾는다. 그의 남편은 알리테아가 공감 능력이 없다며 불평하고 딴 여자를 만나 떠난다. 그래서 알리테아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남들과 엮일 생각은 없고 거리를 둔다. 지니가 그에게 뭘 갈망하는지 물었을 때 그런 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뿌듯해한다. 갈망이 없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 극 중 알리테아는 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어떻게 봤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알리테아는 진화한다. 생각을 바꾸면서 진화하는 거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지니가 알리테아를 변곡점으로 데려간다. 홀로 살며 감정을 주지 않고 세상과 담쌓는 삶을 끝내게 해준다. 그가 감정을 느끼고, 큰 모험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변할 기회를 지니가 만들어 줬다고 생각한다.
▷ 알리테아가 얻은 교훈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없단 걸 배운다. 오직 내 인생만 통제할 수 있다. 너무 즐거운 모험이었고 다시 내 인생에 만족해하며 지내지만 이번엔 감정을 허용한다. 그걸 깨달은 것 같다. 감정과 이성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관심과 무관심도 마찬가지다.
▷ 알리테아가 보는 것에 관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다른 해석은 어떤 것인가?
이 영화는 헛것을 보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의 눈에만 지니가 보이는 거다. 다른 사람 눈에도 지니가 보이는지 관객들이 궁금해할텐데 그 부분은 영화에서 장난을 좀 쳤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진짜로 지니를 불렀을 수도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요점은, 그가 원하는 모습의 지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지 밀러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닮은 점
▷ 이드리스 엘바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진 건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드리스 엘바를 파티에서 한 번 만났다. 난 그런 데 안 가는 편이라 너무 어색한 문장이긴 하지만 이드리스를 파티에서 만났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겠지만 형식적인 말이다. 몇 년 뒤 조지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이드리스가 떠올랐고 감독도 이미 그를 고려 중이었다. 그렇게 이 작품에서 정식으로 만났다.
▷ 거장 조지 밀러 감독과의 첫 작업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는 꿈같았다. 먼저 나는 조지 감독의 열렬한 팬이다. 감독의 작품은 여러 면에서 날 어린아이처럼 들뜨게 한다. 우리 세대는 히치콕 감독과 일할 기회가 없어서 속상하지만 우리에겐 조지 밀러 감독이 있다. 그를 동료라 부를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의미다.
▷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그는 어떤 감독이었는지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감독의 마법 상자에서 같이 일하며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건 정말 놀랍고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이다. 감독의 모든 작업과 기술, 능력에서 느낀 건 실제로 촬영할 때 감독이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감독은 엄격한 규칙이라기보다 정립된 규칙을 따른다. 작업할 때 스토리보드와 숏 리스트를 사용하는데 종이가 노랗게 바랠 정도로 오래 보곤 한다. 감독이 심사숙고해서 길고 잘 짜인 틀을 만들어 온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작업할 것이다.
▷ 조지 밀러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닮은 점이 있다고?
막상 촬영할 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라고 의견을 내면 흔쾌히 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 나온다. 다른 감독과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친구이자 파트너라 영광인 봉준호 감독이다. 봉준호 감독도 스토리보드를 사용하고 편집자를 옆에 앉혀 놓고 작업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감독도 비슷하다. 잘 짜인 틀을 제시하지만 재량껏 연기해도 된다.
▷ 본인이 생각하는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영화의 형태 혹은 추구하는 궤도나 방향은 어떻게 보면 진화다. 인간의 진화 혹은 사회적 진화라 표현하고 싶다. 특히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인지 물어본다면 맞다. 아주 정확하다. 그런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표현된 건 아니지만 영화 속에 담겨 있다. 알리테아는 이야기에 가장 최근에 합류한 인물이다. 그 뒤엔 또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성들의 성취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는 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