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응급실 소아청소년과 진료는 오전 9시~오후 10시까지만 가능합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다. 밤 10시 넘은 시간에는 아파도 진료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대 목동병원은 아예 소아청소년 환자가 응급실에서 진료를 보지 않고 있고, 인제대 상계백병원도 평소의 40% 수준으로 줄여 소아청소년 응급 진료를 보고 있다.
지난 12일 가천대 길병원이 입원을 중단한 것은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 부족 사태가 곳곳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일반 지역에 있는 소아청소년과 병원도 최근 독감 등으로 북새통을 이루며 야간 진료를 받기가 여간 힘들어진 게 아니다.
내년도 소아과 전공의 충원율은 사상 처음 10%대(16.6%)를 기록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얘기다.
# 2. 2020년 8월 의사들이 가운을 벗고 거리로 나섰다. 20년 전 의약분업 파업 때만 해도 응급실·중환자실을 비우지 않았는데 이때는 필수의료인력까지 자리를 비웠다.
당시 정부와 여당(더불어민주당)이 의대 정원을 4천 명 늘리는 방안에 대해 결사반대하며 유례없는 파업을 벌였다.
코로나19가 한창인 상황에서 정부는 결국 "복지부는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 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의협과 협의한다"라는 대한의사협회와의 합의안을 내놓고 물러섰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려 부족한 의료 인력을 채우고, 3천 명을 지역의사로 키워 지역 간 의료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사회적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의사 부족현상은 이제 국민 누구나 피해를 볼 수 있는 시급한 현안이 됐다. 의료인력이 부족하면 위급한 환자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할뿐더러 의사들의 업무량이 많아지면서 충실한 진찰과 치료도 어렵게 된다. 초고령화 사회를 향해 빠르게 진입하면서 의료수요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교육부는 최근 보건복지부에 공문을 보내 의대 정원을 늘려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의대 정원은 2006년 이후 17년째 연간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의사 부족한데, 의료계는 왜 괜찮다고 할까
2020년 파업 때 의협 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비교해서 ①절대적인 의사 숫자가 적지 않고, ②의사가 많아질수록 국민 의료 부담이 늘어난다는 논리로 반대했다.이중 두 번째 이유를 '공급자 유발 수요'라고 하는데, 의사가 새로 개업을 하면 수익을 내기 위해 환자에게 치료와 입원을 권하면서 전체 진료비가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건 통계 2022'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 연말 기준 한국의 인구 1천명당 활동 의사 수(한의사 제외)는 2.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3.7명)의 56.8%였다. 가장 높은 서울(3.4명)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1.8명에 그쳤다.
의학계열(한의학 포함·치의학 제외) 졸업자도 인구 10만명당 7.2명으로 일본과 이스라엘 다음으로 적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전문과목별 의사 인력 수급 추계'를 통해 2025년 5516명, 2035년 2만7232명의 의사가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2026년 초고령사회(총인구에서 만65살 이상 비율이 20%이 넘는 경우)로 진입하고, 근골격계 등 진료 빈도 잦은 질환이 많아지는 점 등을 반영한 수치다. 보사연은 "의사 1인당 업무량이 14.7% 증가한다"고 부연했다.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 생존의 문제?
의사들이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득권 카르텔'을 지키기 위한 것이란 비판이 적지 않다. 변호사를 많이 양성해 법률 서비스 문턱을 낮추려던 로스쿨 제도에 대해 법조계가 반대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라는 것이다.이상이 제주대학교 의과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기고문에 의사들의 반대의 근본 이유를, 한 후배의 얘기를 인용하면서 단적으로 보여줬다.
"먼 훗날이 될지, 가까운 미래가 될지, 내가 개업한 지역에도 같은 과목을 진료하는 후배들이 진입해 들어올 것이고, 그때는 아마 내 환자 중의 30% 이상은 그쪽으로 간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되면 아마도 개업 상황이 매우 힘들어질 것인데, 이런 상황이 가장 두렵다."
의료계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수가 인상'을 요구해왔다. 의대 정원을 늘려봤자 인력이 부족한 필수의료 분야보다 수입이 좋은 성형외과, 피부과 등으로 또 몰릴 것이란 이유에서다.
"필수의료 수가 높여야" vs "3억 준다고 해도 안 가는데"
복지부의 분석자료에 따르면, 전문의 임금 소득은 봉직의와 개원의 모두 한국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이는 절대액수가 아닌 물가 수준을 고려한 구매력 평가 환율(PPP) 기준이다.
국내 임금 노동자 소득과 비교해 개원의는 7.1배, 봉직의는 4.6배 높은 수준이다. 이런 통계를 보면 의사들의 정원 확대 반대는 '밥그릇 싸움'으로 비친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나라에 비해 노동 시간이 길고 강도도 세다. 환자 대비 의사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다.
보건의료노조의 실태조사를 보면 일부 의사들은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 1년에 100일 당직을 서야 한다. 야간 당직 때 밤새 환자 돌보고 휴식시간 없이 다음날 주간 근무에 바로 투입되기도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필수의료 분야에서는 수가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협 뿐 아니라 일부 시민단체 쪽에서도 나온다. 의사들이 기피과에 지원할 동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예를 들면 산부인과나 소아과 수가를 더 높이면 그쪽으로 좀 더 의사들이 지원하게 된다"면서 "또 지역적으로 선호도가 낮은 지방이나 시골에서 환자 보면 좀 더 숫가를 많이 주는 이런 형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수가 인상이 만능열쇠가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경민 참여연대 사회경제2팀장은 "한 지역의료원에서 영상의학과 의사를 채용하는데 연봉 3억원이 적다고 지원을 아무도 안 했다고 한다"면서 "의사 확충 문제는 수가 인상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이 팀장은 "만약 수가를 올린다면 간호 인력을 늘리는 등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사람은 모두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에는 동의했지만, 수가 문제에선 입장 차이를 보였다.
상업성 추구하는 비영리 병원들…허약한 공공의료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초창기인 지난 2020년 9월 독일 정부는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을 포함한 공공의료 인력을 2년 안에 5천 명 확충하기로 계획을 결정했다. 또 여권 안에서는 1만명인 의대정원에서 5천 명을 추가하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우리도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공공의료 확대 필요성이 다시 대두됐다. 공공병원들은 감염병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최전선에 움직이면서 'K-방역'의 성과를 내는데 큰 몫을 했다.
또 공공의료는 지역별 의료 격차를 해소하고, 수익성이 낮은 필요의료 분야의 공백을 메우는 핵심적인 역할은 한다.
공공의료 확대는 의대 정원 확충이 전제 조건이다. 지역에서 근무하거나, 기피과에 투입할 인력부터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로 공공의대 설립을 위한 법안들이 국회에 여러 건 발의돼 있다.
한국은 그동안 공공의료를 방치해온 결과, 민간병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95%에 달한다.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를 사실상 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여연대의 분석에 따르면, 공공의료 관련 내년 예산은 올해 예산(추경 포함) 5억 원에서 1억 9천만 원으로 60% 이상이 줄었다.
민간병원은 '비영리'라고는 하지만 공공성은 약하고 수익성을 우선시한다. 윤석열 정부에서 크게 문제삼고 있는 과잉진료와 비급여 확대 진료도 여기에서 시작한다.
백재중 신천연합병원장은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라는 대담집에서 "공공병원이 적어도 20~30퍼센트 정도만 돼도 안전판 역할을 해주면서 의료시스템 전체적으로 균형이 생길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백 원장은 공공병원에서 적정진료를 실천하면 "민간변원의 수익성에 치우친 과잉진료를 견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