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정영학 녹취록부터 불법 정치자금 '그분' 폭로전까지 (계속) |
"재판을 통해서 모든 사실이 다 밝혀질 수 있도력 노력하겠다"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공판 첫날,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의 말이다. 이달 9일 69회차를 맞기까지 공판의 큰 줄기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최측근이 어떻게 사업 편의를 봐줬고 성남시장이었던 이 대표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입증 과정이었다. 하지만 열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대장동 5인방(김만배·남욱·유동규·정민용·정영학)'의 말들은 엇갈리기 시작했고 '이재명'이라는 이름은 중간중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도 했다.
그 사이 유 전 본부장과 또 다른 '키맨'인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는 푸른 수의를 벗고 석방 후 각자의 기억을 다시 법정에서 증언하고 있다. 현재 재판은 김씨의 자해와 법원 휴정기로 잠시 멈춘 상태다. 다음달 재판이 재개되면 다시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질 예정이다. 지금까지 공방은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들에게 민간업자들의 자금이 흘러갔고 그 대가로 사업 편의가 이뤄졌다는 주장과, 이같은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반박 구조로 이어져왔다. 앞의 주장은 돈을 줬다는 남 변호사와 중간에서 전달했다는 유 전 본부장이 펼치고 있고, 김만배씨와 정영학 회계사가 이들의 주장에 맞서는 형국이다.
성남시 직원 "의아했던 성남시 사업 방식"
그 다음 공판에서도 또다른 직원이 비슷한 취지로 증언했다. 성남도공 전략사업실장이었던 김모씨는 "확정이익 방식이라 의아했다", "정민용 변호사가 성남시장 비서실에 대장동 보고서를 여러 번 갖다줬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이 "공모지침서에 민간 사업자에게 많은 이익을 수취할 기회를 부여한 반면 공사의 배당 이익을 박탈해 부당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건 시정(市政)을 책임지시는 분이 판단할 사항이어야 한다"고도 답했다. 대장동 공모지침서에 초과이익 환수 조항이 포함됐다가 빠지면서 성남도공이 확정이익 방식으로 이익을 챙긴 게 이재명 대표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표와 그 측근 등 윗선은 '비서실'로만 통칭될 뿐이었다.
안들리는 듯 들린 정영학 녹취…그가 기억하는 또 다른 진실
4월부터는 대선 정국을 강타했던 일명 '정영학 녹취록'이 법정에서 재생됐다. 이 녹취록은 '대장동 5인방' 중 세 명인 김만배씨와 남욱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가 경기도 분당의 한 카페에서 2012년부터 2014년, 그리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사업을 논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정 회계사가 자신의 이익을 보장 받기 위해 '보험용'으로 녹음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정 회계사와 검찰에서 선별한 상태라 녹음된 부분 전후에 어떤 맥락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변호인들의의 문제제기에 재판부는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총 30시간 분량의 녹취록을 법정에서 재생했다. 정 회계사의 녹음파일은 총 140시간 분량이었지만, 검찰과 협의 끝에 30시간 분량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조악한 음질과 몇몇 음성파일이 빠져있는 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 전 본부장은 "진술 내용이 변호인 입장에서는 거의 99% 이상 안 들리는 상황"이라며 녹음된 대화 내용이 식별 가능할 수준으로 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조서에도 기재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도 "오늘 처음 재생한 파일의 경우 재판부도 거의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다"며 "검찰이 제출한 녹취서 보면 총 녹음시간 분량은 1시간 20분인데 녹취록이 작성된 페이지는 19페이지에 불과하다"며 유 전 본부장 측의 문제 제기에 수긍했다.
하지만 대장동 개발을 민관합동으로 추진하고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성남시의회와 유 전 본부장에게 로비한 정황이 녹취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 회계사는 김씨에게 "제가 전략을 짰는데 유 전 본부장만 보시면 된다. 지금부터는 유 전 본부장이 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대장동 업자들이 유 전 본부장에게 건넬 돈을 마련하고, 유 전 본부장이 돈을 재촉하는 모습도 녹취록에 담겨 있다. 특히 2014년 5월 16일 통화 녹취에선 '0.9'가 등장하는데 이에 이날 재판에서 검찰이 "0.9가 9000만원 관련 부분인데 이 돈을 전달한 대상이 유 전 본부장이 맞는가"라고 묻자 정 회계사는 "그렇게 기억한다"라고 답했다.
재판부가 보름 동안 '정영학 녹취록'을 심혈을 기울이며 듣는 동안 성남시를 상대로 한 대장동 업자들의 전방위적 로비 정황도 드러났다. 녹취록에서 김씨는 "한구 형은 누가 전달하지?"라고 묻자 정 회계사는 "형님(김만배)이 비자금을 갖고 나갈 돈이 그럴 용도로 갈 게 있다면 가져간 비율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한다. 대장동 업자들이 2014년 11월 성남도시개발공사가 대장동 사업의 민간 사업자를 공모하기 전부터 로비 활동을 벌여온 정황이 녹취록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남욱·유동규가 쏟아낸 폭로…실소유주 '그분'과 불법 정치자금
대장동 공판이 본격 시작된 지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이재명 대표와 그 측근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김용 전 민주연구원장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법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유 전 본부장이 업자들과 성남시 사이 중간고리 역할을 하며 모종의 편의를 봐준 정황은 수차례 언급됐지만,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던 상황이었다. 흐름을 바꾼 것은 자유의 몸이 된 유 전 본부장과 남 변호사였다.유 전 본부장은 지난 10월28일 공판이 끝난 뒤 "김용 부원장에게 자금을 넘길 때 대선 자금으로 쓰일 거라는 것을 알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경선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김 전 부원장은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시기였던 지난해 4월부터 8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대장동 민간업자인 남욱 변호사로부터 8억여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현금으로 건네받은 혐의로 현재 기소됐다. (참고기사 : [단독]검찰, 이재명 캠프 '불법 대선자금' 정황 포착)
남 변호사는 또 선거 자금 뿐 아니라 베일에 쌓여있던 천화동인 1호의 실소유주에 대해서도 "이 시장 측 지분"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만배 씨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천화동인 1호 지분 49%를 (이재명 대표 측과) 반씩 나누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돈을 줬다는 남 변호사와 그 돈을 이 대표의 최측근인 정진상·김용에게 전달했다는 유 전 본부장의 증언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다만 이 돈이 이재명 대표, 이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 의원, 성남시의원의 주머니에까지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검찰이 향후 입증해야 할 부분이다. 중간에 있던 또다른 연결고리 김만배씨의 주장은 남 변호사의 증언과 다르기 때문이다.
'추측'이라며 남욱 몰아세운 김만배…자해 후 입장 뒤집을까
김씨 측 변호인은 지난 5일 공판에서 남 변호사에게 "김만배씨가 김태년 의원과 친분이 깊다면 의원에게 (직접) 주면 되지 보좌관을 통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남 변호사는 "잘 모르겠다"고 다소 어정쩡한 답변을 내놨다. 김씨 측이 재차 "돈이 실제 어디에 사용됐는지 확인한 적은 없지 않느냐"고 따졌고, 남 변호사는 "제가 답변할 부분 아닌 것 같다. (김만배에게) 5천만 원을 드렸다고 하면 (뇌물로) 2500만 원 가고 2500만 원은 본인이 쓰셨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김씨와 남 변호사는 가장 최근 공판(지난 9일)에서도 강하게 맞붙었다. 남 변호사가 재차 이재명 대표의 천화동인 1호 지분 24.5%를 언급하자, 김씨 측 변호인은 "소문이나 추측에 불과한 진술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남 변호사의 증언은 대부분 김씨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근거한 전언이기 때문에 김씨가 부인하면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법조계 관계자들은 김씨 역시 자신의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남 변호사와 김씨 중 누가 더 진실에 근접한 증언을 하는지는 재판부가 판단할 몫이라고 입을 모은다.
휴정기가 끝나는 1월 중순쯤 재개될 공판에서는 정민용 변호사가 증언에 나선다. 민간업자들이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성남도공에 근무하도록 한 사람이다. 그 뒤 유 전 본부장과 김씨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질 예정이다. 김씨가 자해까지 한 만큼 그가 입장을 고수할지 다시 또 뒤집을 지에 재판의 향배가 갈린다. '대장동 5인방'에 대한 증인신문이 모두 마무리되면 민간업자가 건네 정진상·김용에게까지 흘러갔다는 정치자금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보다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