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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제주 첫 호텔 동양여관…명성 사라진 자리 남은 건 삶 (계속) |
'월셋방 있습니다.'
지난 11일 오후 6시쯤 제주시 삼도2동 동양여관 출입문 바로 옆에는 이런 내용의 표시판이 내걸려 있었다. 출입문을 열자 신발장에는 흙먼지가 묻은 목이 긴 워커화로 가득했다. 복도는 어두웠다. 빛바랜 나무 바닥과 벽 사이로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26년 전부터 동양여관을 운영하는 조순여(80‧여)씨는 취재진에게 "우리는 일반 손님은 안 받는다. 집이 헐어서 하루하루 자는 사람은 안 받아봤다. 달세만 받았다. 대개 일용직 노동자들만 산다. 요즘은 일거리가 없는지 손님도 없다. 객실이 13개인데, 3곳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란히 벽에 걸린 'Fly Korean To Bangkok' 'Fly Korean To Hong Kong'이라고 적힌 옛 항공사 홍보 포스터만 과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 첫 호텔…"몇 안 남은 일제강점기 절충식 건축물"
동양여관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지어진 제주의 첫 호텔이다. 과거 고급 호텔이었던 동양여관 일대는 요정, 상가, 관공서들이 밀집해 있던 제주도 최고 번화가였다. 동양여관 바로 옆에 있었던 탐라여관은 1970년대 박노식, 신영균 등 당대의 영화 스타들이 제주에 올 때면 머물렀던 곳이다.
동양여관은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에 있어서도 희소성이 있다. 일식과 한식을 혼합한 절충식 건축물이다. 복도 양측에 객실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거실이 있는 구조다. 거실 옆 2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복도를 따라 객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계단 중간에는 공용화장실이 있다.
객실은 대체로 4㎡ 남짓으로 성인 남성(키 185㎝)이 넉넉하게 누울 수 있는 크기다. 특히 오래된 나무 문 앞에 '특실'이라고 적힌 객실에는 당시에도 극히 드물었던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딸려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대 인근 관덕정 광장에서 대중연설을 한 뒤 이 특실에 묵기도 했다.
제주대학교 건축학과 김태일 교수는 "동양여관의 경우 건물 내부가 목조로 돼있고 방 안에 화장실이 있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극히 드문 양식이다. 현재까지 일제강점기 때 지은 목조 가옥은 조금 남아있지만, 숙박업소는 거의 없다. 희소성과 시대성이 있는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
도로 확장하며 건물 일부 없애고 태풍에 기와 날아가
보전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동양여관의 훼손은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었던 여관 앞길을 소방도로로 확장하며 동양여관 출입구 일부가 없어졌다. 사라진 곳에는 세련된 디자인의 포치(출입구 바깥쪽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가 있었다.
동양여관 바로 옆에 있던 탐라여관 역시 도로 확장으로 건물 일부가 철거되면서 옛 모습이 변형됐다. 지금은 건물 2층 외벽에 문이 달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처량하게 서있다.
조순여씨는 "행정에서 도로를 뺀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건물 일부를 철거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 원래 출입구 앞으로 철쭉을 심어놓은 화단이랑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꽃나무가 너무 예뻤는데 다 사라져버렸다. 보전하려면 다 놔둬야 하는데, 길 빼면서 다 없애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특히 건물 위에 있던 청기와 역시 여러 차례 태풍을 겪으며 사라지고 있다. 조씨는 "지금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기와인데 태풍 매미 때 다 날아가서 깨지고 없다"고 아쉬워했다.
동양여관 인근 오래된 목욕탕인 '태평탕'을 리모델링해 카페를 운영하는 조이진(37‧여)씨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에 대한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조씨는 "원도심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다른 관광지에 비해 덜 찾아온다. 원도심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은데 행정에서 이 건물들을 색다른 공간으로 활용하는 시도가 있으면 좋겠다. 개인이 하는 것보다는 더 질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광객도 많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근대건축 보전 지원 제도 한계…행정업무 어려움도
현재 동양여관처럼 민간에서 소유하는 근대건축물의 경우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행정에서 보전에 대한 지원이 이뤄진다. 하지만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다.
김태일 교수는 "민간 근대건축물인데도 건축 자산으로 등록하면 큰 금액은 아니지만 약간의 지원을 받아서 개보수하고 원형을 유지하는 제도다. 관련 도 조례도 있다. 하지만 제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행정에서 예산 확보라든가 민간 홍보가 미흡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오래된 건축물 원형을 유지하려고 해도 행정업무의 어려움이 많다는 의견도 있다. 오래된 건물의 경우 옛 건축법에 맞게 지어져 있어서 현행 건축법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45년 된 세탁소인 '태평사'를 리모델링한 카페를 운영하는 이대우(45)씨는 "옛날 건축물이라 현행 건축법과 소방법에는 맞지 않아서 행정업무를 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행정적으로 쉽게 풀어나갈 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오래된 건물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행정적 어려움에도 오래된 건축물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세탁소가 너무 더러워서 내부를 새롭게 싹 바꾸려 했다. 하지만 청소하면서 과거 세탁소를 운영했던 노부부가 손빨래 하던 울퉁불퉁한 돌이라든지, 70년대 벽지가 나왔다.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45년의 역사가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그대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