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인 인천 소재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길병원 소아청소년과(소청과)가 인력난으로 입원진료를 잠정 중단하면서 '필수의료' 인프라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산부인과와 함께 대표적 기피 과(科)로 꼽히는 소청과는 고질적 '저수가' 문제에 유례없는 저출산,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직격타를 맞았다.
1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길병원 소청과는 이달 초부터 내년 2월 말까지 입원진료를 접기로 했다. 현재 재원 중인 환자들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입원환자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환자를 볼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 손동우 길병원 소청과 과장은 편지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지역 내 협력의료기관에 알린 것으로 파악됐다.
손 과장은 이 편지에서 "전공의 수급이 되지 않은 지 이미 수년이 흘러 이제 4년차 전공의들이 전문의 시험 준비에 들어가면 저희에게는 2년차 전공의 한 명만 남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전공의는 의사 면허 취득 후 대학병원 등에서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수련과정을 거치는 인턴·레지던트를 이른다.
길병원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보통 이 근처에서 소아과나 가까운 개원병원을 가면 가끔 의사가 '큰 병원 가보세요' 할 때 환자를 전원시키던 곳이 저희 병원"이라며 "외래환자는 보내도 되지만, 입원이 필요한 환자는 여기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그만두시거나 연수를 가신 분들도 계신데, 그 공백이 메워지지 못했다"고 전했다.
병원 측은 내년 3월경 전문의 충원이 이뤄지면 입원진료를 재개할 방침이지만, 계획대로 될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손 과장은 "전국의 여러 종합병원 이상 대학병원에서도 소청과 진료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며 "소아청소년과학회에서도 존립의 위기로 생각하고, 정부와 국회 등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경과를 알려 주시지만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적었다.
실제로 소청과 '진료 대란'은 비단 길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주요 상급종합병원 대부분은 올해도 소청과 전공의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른바 '빅(Big) 5'로 불리는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세브란스병원 중 내년 상반기 전공의 1년차 정원을 충족한 곳은 서울아산병원이 유일하다. 아산병원은 8명을 모집한 소청과에 10명이 지원했다.
이에 반해 모집인원이 11명이었던 세브란스병원은 지원자가 '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청과 지원자가 있는 의료기관도 결원 사태가 잇따랐다. 삼성서울병원은 6명 모집에 3명이 지원했고, 서울대병원은 14명 모집에 10명이 지원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성모병원이 포함된 가톨릭중앙의료원은 정원 13명에 1명만이 지원했다.
내년도 전반기 전공의를 모집한 수련병원 62곳 중 소청과 모집을 진행한 60곳에서 지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 곳은 11곳에 그쳤다. 전국 기준 소청과 지원율은 2019년 80%→2020년 74%→2021년 38%→2022년 27.5% 등 매년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24시간' 소아청소년 응급환자를 받을 수 있는 수련병원은 36% 수준이다.
전반적인 인프라가 쪼그라드는 중에 의료진이 '고령화'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전공의 기근'으로 젊은 인력 수급이 끊기자, 정년을 앞둔 교수들이 야간 당직을 서는 일은 예사가 됐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2020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은퇴자를 포함해 현재 환자를 직접 진료하고 있지 않은 의사나 전공의를 빼고 주 진료과목을 살펴본 결과, 소청과는 10% 미만(9.8%)을 기록했다. 내과(35.2%), 정형외과 (13.2%), 피부과(11.8%) 등보다 확실히 낮은 수치다.
특히 젊은 의사 중 소청과 종사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령별로 20대는 내과(55.3%)와 정형외과(16.7%), 피부과(10.1%)가 가장 많았고, 30대도 다르지 않았다(내과 33.6%, 정형외과 13.8%, 피부과 12.3%). 소청과가 2순위(14.5%)를 기록한 연령대는 가정의학과(35.6%)가 최다를 차지한 50대다.
이밖에 60대(13.4%)와 70세 이상(10.1%)에서 간신히 10%대를 지켰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소청과 인프라 붕괴가 이미 예견된 참사였다고 지적했다. 지난 5년간 폐업한 소아과가 660여 곳에 달한다는 점을 들어 개원병원부터 무너진 '도미노'가 상급병원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짚었다.
임 회장은 "한 (소청과) 개원의 선생님이 '내가 지난달에 25만 원을 벌었다'고 하더라. 월수입이 그 정도인 게, 그나마 다행인 케이스"라며 "빚을 얻어가며 버티다 버티다 폐업하신 분이 한두 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소아과는 대개 '진찰료 곱하기 명수'가 수입인데 기본 수가가 현저히 낮다 보니 유지비도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4년부터 아이들이 휴일·야간에 소아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진료기관을 선정해 지원하는 '달빛 어린이병원'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실효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의협은 "취지는 좋으나 소아환자 보호자 입장에선 가까운 1차 의료기관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며 의원급 의료기관의 참여가 여건 상 제한된다는 점 등도 한계로 꼽았다.
소아 확진자의 증가 및 대면진료의 위축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소청과 의원은 폐업기관(120곳)이 개원의(93곳)를 앞섰다. 코로나 이후 병원 폐업을 준비 하고 있거나 1~2년 내 폐업계획이 있다고 답변한 전문과 중 소청과(53.0%)가 가장 많았다는 의협신문의 조사도 있었다. 매출이 '반토막' 난(50% 이상 감소) 의료기관도 소청과(50.0%)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임 회장은 "개원의 다음은 봉직의와 월급의사들이다. 개업을 한 사람도 망해서 떠도는 판에 이들이 어디에 취직하겠나"라며 "이분들이 요양병원에 가서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진료를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전문의 자격이 있는) 소아과 의사 자체가 부족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를 특별히 예뻐하고 소명의식이 있어서 소청과를 지원하려 해도 이런 선례를 보면 선뜻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낮에는 (연차가 꽤 되는) 교수가 외래 진료를 보고, ICU(중환자 집중치료실) 환자를 보다가 밤에는 번갈아 응급실을 지킨 게 벌써 2년이다. 지금은 그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아암을 일례로 들어 수도권의 규모 있는 상급종합병원들도 기존 내원 환자 외 신규 환자를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임 회장은 연이은 전공의 미달 사태가 당장 내년의 '후폭풍'으로 나타나리라 전망했다. 그는 "이젠 응급실 차원을 넘어서 길병원처럼 입원환자까지도 못 보는 지경이 됐다"고 진단했다.
정부는 보장성 강화에 초점을 뒀던 '文케어'를 폐기하고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높여 확보된 예산으로 필수의료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전공의를 확보할 수 있는 '알맹이'가 빠졌다는 점에서 정부가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임 회장은 "40대 대학병원 (소청과) 교수들도 '줄사표'를 내고, 시니어 교수들이 만류하는 상태인데 정부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건보 재정을 아껴 메꿀 게 아니라, 일반 재정으로 굉장히 시급하게 투입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 직속으로 '소아 진료 인프라 유지위원회'를 빠른 시일 내 구성해야 한다. 복지부와 각종 예방접종을 관장하는 질병청, 기획재정부도 당연히 포함돼야 할 것"이라며 "소청과 학회 등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수가체계 개선은 물론 의사들이 환자 부모들을 대하며 겪는 '감정 노동'의 문제도 일부나마 해결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한편, 복지부는 "어린이공공전문진료센터 적자 사후보상, 중증소아 재택치료 및 단기입원 지원, 소아암 거점병원 육성 등 중증소아 환자에 대한 진료기반을 확충할 것"이라며 "소아전문 응급의료센터 확충, 달빛어린이병원 등을 통해 소아 응급환자의 진료 접근성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의대 교육과정에서 소아심장 등 특수전문분야 의사 양성을 위한 실습지원을 확대하고, 전공의 수련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