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재계 총수 등을 두루 만났다. 빈 살만 왕세자는 에너지와 방산 등의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하기를 바란다고 밝혔고, 우리 기업들은 사우디 정부와 기업들이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대거 참여하기로 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17일 새벽 0시 30분쯤 서울공항을 통해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했다. 지난 2019년 6월 방한 이후 3년 5개월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른 새벽 시각이지만 한덕수 총리가 공항에 나가 빈 살만 왕세자를 영접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날 밤 늦게 또는 18일 새벽 일본으로 향한다.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은 약 24시간 정도이다. 방한 기간 숙소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다. 수행원들이 묵을 방까지 포함해 모두 400여개의 객실을 빌렸다고 한다.
만 하루 정도의 짧은 일정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끈 방한이었다. 빈 살만 왕세자가 들고 있는 보따리의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네옴(Neom)시티를 비롯해 사우디 정부와 기업이 추진하고 있는 각종 초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업들을 물색하고 있다. 전 세계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당연히 한국 기업들도 빈 살만 왕세자와 사우디 정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는 네옴시티를 비롯한 '사우디 비전 2030' 이라는 국가발전전략을 이행하는데 한국을 5대 중점 협력국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가장 관심을 끄는 사업은 네옴시티인데 한마디로 사막에 첨단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네옴시티는 아라비아반도와 이집트 사이 아카바만 동쪽에 건설되는 미래 신도시로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사업비는 5000억달러, 한화로 약 670조원이다.
네옴시티의 규모를 보면 네옴시티에 들어가는 선형도시를 '더 라인'이라고 한다. 더 라인은 네옴시티가 들어서는 사우디 북서쪽의 타북이라는 지역에서부터 사우디와 이집크, 요르단의 국경이 만나는 홍해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데 폭 200미터 높이 500미터의 선형 구조물이 170킬로미터 길이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롯데월드타워 555미터인데, 이같은 높이의 건물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죽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처럼 건설되는 도시에 주민들이 살고 그 외 지역은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이 사우디의 구상이다. 이를 위해 도로와 차, 탄소배출이 없고, 100% 재생에너지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것이 사우디의 구상이다.
이밖에 바다 위에 떠있는 산업단지인 '옥사곤'과 연중 스키를 비롯해 각종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는 '트로제나' 등도 네옴시티에 포함된다.
이렇게 전례가 없는 초대형 사업인 만큼 각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이 사업에 참여하려 하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같은 사업을 벌이겠다고 지난 2017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빈 살만 왕세자와 단독·확대회담과 오찬을 가졌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사우디는 우리의 중동지역 최대 교역 파트너이자 경제와 에너지 안보의 핵심 동반자"라며 인프라와 에너지, 방산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자고 말했다.
이에 대해 빈 살만 왕세자는 "에너지와 방위산업, 인프라 건설 등의 3개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싶다"고 화답했다.
이에 따라 우리와 사우디는 이번 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를 '미래 지향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기로 하고 '전략파트너십 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어 오후에 숙소인 롯데호텔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국내 기업 총수들을 만났다.
실제로 이미 계약이나 양해각서가 체결된 사업도 확인됐다. 이날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한국과 사우디의 정부와 경제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사우디 투자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26여건의 각종 계약과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삼성물산 등 국내 5개 기업이 사우디 국부펀드와 태양광과 풍력 등의 생산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 예정사업비가 65억달러, 약 8조5000억원이다.
현대로템은 사우디 투자부와 네옴 철도협력 양해각서를 맺었다. 앞서 네옴 도시인 더 란인을 차가 없는 도시라고 했는데 사우디는 더 라인의 양 끝을 이동하는데 20분 정도 걸리는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은 2조5000억원 규모이고, 사업을 따내면 국내 첫 고속철도 수출이 된다.
또 에스오일이 울산에 2단계 석유화학사업 프로젝트를 위해 국내 건설사와 설계·조달·시공(EPC) 계약을 맺었다. 사업비가 약 9조원으로 단일 사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외국인 투자인데 에스오일의 대주주가 사우디 국영기업인 아람코이고 아람코의 대주주가 바로 빈 살만 왕세자이다.
이밖에 화학과 가스, 열병합, 제약, 백신, 스마트팜, 게임 등의 분야에서도 양해각서 또는 사업추진 합의서가 성사됐다.
이날 포럼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이창양 장관은 "사우디의 대표적인 스마트시티인 네옴에 철도망을 구축하고 수소기관차를 공동개발하는 한편 홍해 등 미래도시 건설에 한국의 최첨단 건설 공법을 적용하는 사업도 서로 신뢰하는 라피크만이 추진 가능한 협력사례라고 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사우디 투자부 장관은 이날 한 사우디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국기업들과 모두 300억달러, 약 40조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대형 사업에 한국기업에 대거 참여할 경우 제2의 중동 특수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다만 기업들이 진출하는 분야는 과거와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기업들은 건설업이 1973년 처음 사우디에 진출한 뒤 지금까지 모두 1557억달러의 공사를 수주했다. 그런데 사우디가 석유의존형 국가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는 만큼 우리 기업들도 재생에너지나 바이오, 우주항공,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에서 협력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과 사우디는 세계박람회 유치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2030년 세계박람회 유치에는 우리나라 부산과 사우디 리야드, 이탈리아 로마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내년 11월 국제박람회기구 170개 회원국의 비밀투표를 거쳐 개최지가 결정된다.
사우디는 오일머니의 압도적인 힘을 내세워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정부도 정부지만 주요 기업들, 민간이 앞장서서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사우디의 초대형 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기업들로서는 박람회 유치 활동에서 이같은 상황, 사우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