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말'이었다. 정은지는 "팬분들과의 장난스러운 약속이었다"라며 "어느 순간부터 '진짜 낼 거야?' 하는 팬분들 덕에 (리메이크 앨범이) 구체화하기 시작했다"며, 스물아홉 살이었던 지난해부터 이미 회사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앨범명 '로그'는 '기록하다'라는 뜻이다. 여행과도 같은 인생을 선배들의 음악으로 재해석하고 다시금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타이틀곡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으로, '흰수염고래' '꿈' '사랑을 위하여' '서른 즈음에'까지 총 5곡이 실렸다. 최근 '로그' 발매를 기념해 열린 라운드 인터뷰에서 정은지는 "이 앨범을 내니까 진짜 열심히 살기는 살았구나 했다"라고 밝혔다.
정은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곡을 할지는 제가 골랐다. 정신없이 작년 말과 올해 초를 보냈다"라며 "앨범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다 만들어지고 나니 긴장보다는 후련함을 느낀다. 약속을 지키게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12년차이자 서른이 되면서 이 앨범을 낼 수도 있고 아이돌로서 처음 시작했을 때 지금이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됐다. 이 앨범을 내니까 진짜 열심히 살기는 살았구나 했다"라고 말했다.
데뷔 이래 가장 바빴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앨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작년부터 기획 중이었고, 원래는 더 빨리 나올 예정이었으나 '술꾼도시여자들' '블라인드' 등 날짜가 조정돼 11월까지로 밀렸다. 정은지는 "아쉽기도 한데 나름 이 노래가 나오기까지 빌드업을 잘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스타일이라서 제가 진짜 요령이 없다. 뭘 하든지 잽싸지도 못하고 스피디한 사람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뭔가 왔을 때 아! 이런 스타일이라서 '맞고 아프다!'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런 타입이다. '아, 너무 힘든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좀만 더 버텨보자' 그렇게 버티면서 계속 지냈던 거 같다"라고 부연했다.
정은지는 "여태까지 제가 불러온 노래가 힐링이고 위로의 노래가 많아서 그 정체성을 많이 빼지 않고 담아가고 싶었다. 리메이크 앨범이더라도 제 정서가 담긴 앨범이고 싶었다"라며 "노래를 쭉 들었을 때 여행길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컨셉 자체가 여행이자 드라이브 트랙이었다"라고 소개했다.
타이틀곡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은 어린이 정은지를 방구석 여행할 수 있게 해 준 곡이다. 정은지는 "(소리가 커서) 혼날까 봐 베개에 파묻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 커서 부르니까 슬프더라. 애기 때는 어린 왕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좋았고 멜로디가 신나고 좋았다"라며 "'나는 사랑보다 좋은 추억 알게 될 거야'라고 하는데 이게 이미 엄청 아픈 사랑도 해봤고 무언가를 딛고 일어나서 부르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게 이런 노래였나, 하고 다시 한번 이 노래를 알게 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흰수염고래' '꿈' '사랑을 위하여' '서른 즈음에'도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정은지는 '흰수염고래'에 관해 "이 노래를 듣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 어떤 직업이든지 힘든 순간이 있지 않나. 저는 (그럴 때) 한 곡 재생을 엄청 한다"라며 "제 지침 같은 곡이어서 무조건 해야겠다 싶었다. 편곡할 때도 원곡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꿈'을 이야기하면서는 원작자인 조용필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정은지는 "서울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 노래와 '서울 이곳은'이란 노래를 들었다. 타향살이를 하는 곡에 애착이 있었다"라며 "정말 화려한 걸 꿈꾸고 올라왔는데 홀로 남아서 힘든 모습, 여기에 제가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 에이핑크로 데뷔한 후 이렇다 할 무명 없이 승승장구해 온 정은지에게 힘든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는 "저는 제가 공연을 훨씬 더 많이 할 줄 알았다"라며 "스케줄을 하다 보면 내가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를 때가 더러 있다. 너무 피곤하고 정신없어서 (도착하고 나서야) '아, 그 스케줄이지' 할 때도 있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훨씬 더 차근차근 원하는 것들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응답하라'도 갑자기 잘돼서 바빠지고 뮤지컬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했다. 도전에 쫓겨 다니다 보니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더라. 번아웃이 왔던 건 이십 대 후반"이라고 전했다.
"연기를 어떻게 시작하긴 했는데 내가 하는 건 정말 마음에 안 드는데, 잘한다고 해주시지만 진짜 잘하는 게 맞나. 저는 저를 많이 의심하는 편이에요. 피곤한 스타일, 아무리 생각해도 저 스스로 좀 피곤한 스타일이죠. 자꾸 저에 대한 의심을 이어오다 보니까 혼자 있을 때 헛헛하고요. 선배님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말해주신 분도 있는데 그 말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정말 못합니다'라고 할 순 없는데 '감사합니다' 하고 뭐가 어떻게 좋았는지 물어보기도 어려웠고 그런 순간을 지나오면서 물음표 너무 많은 것의 반복이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시 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 본인의 평가 간극을 줄여나갔는지 묻자 정은지는 "줄어들진 않았다"라면서도 "어떤 걸 해내는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래도 이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긴 하다"라고 전했다.
무엇을 하든 잘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정은지에게서 나온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정은지는 "그게 티 나는 게 싫다, 일할 때"라며 "나가서 이런 뭔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기도 하고 창피한 게 싫기도 하다. 주눅 들어 있는 순간을 보고 '누군가 괜찮아?' 하면 (그걸) 설명해야 하니…"라고 말했다.
"잠깐이지만 원곡이 생각 안 났으면 좋겠어요. 리메이크는 비교해서 들으시는데 이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당연히 원곡이 더 좋죠. 제 입장에서도 그래요. 이 앨범 나오는 시점에서는 그 순간만큼은 잠깐 뒤로 두시고 듣고 이제 나중에 원곡을 찾아보셔도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