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가 벌어지기 전, 경찰이 압사를 우려한 시민들의 신고를 다수 접하고도 부실한 대응을 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생명이 걸린 다급한 112신고를 사실상 '묵살'한 이번 사태를 두고 경찰 책임론이 거세게 불 전망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부실한 대응을 인정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또 112신고 내역을 공개하면서 감찰 및 수사를 통해 강도 높은 진상 규명을 벌이겠다고 강조했다. 경찰청 주도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 가운데, 경찰 내부 칼 끝이 어디로 향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참사가 벌어지기 전인 지난 10월 29일 오후 6시 34분부터 오후 10시 11분까지 총 11차례의 112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신고자들은 인파가 몰린 다급한 상황을 전하며 경찰의 현장 통제를 호소했다.
첫 신고는 참사가 발생한 해밀톤호텔 골목길 편의점 쪽에서 들어왔다. 신고자는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데 계속 밀려오니까 압사당할 거 같다. 겨우 빠져나왔다"며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신고는 △오후 8시 9분 △오후 8시 33분 △오후 8시 53분 △오후 9시 △오후 9시 2분 △오후 9시 7분 △오후 9시 10분 △오후 9시 51분 △오후 10시 △오후 10시 11분 등 참사가 벌어지기 4분 전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넘어지고 다치고 난리다", "대형 사고 일보 직전이다", "압사 당할 것 같이 사람이 많다" 등 모두 다급하게 사고를 예견한 내용들이었다. 신고자들이 '압사'란 단어를 언급한 횟수는 총 9차례다.
그러나 경찰은 11건의 신고 중 4건만 현장에 출동해 조치하는데 그쳤다. 나머지 6건은 전화 상담 후 종결했다. 또 출동은 초기에 집중됐을 뿐 정작 인파가 더욱 늘어난 후반 시간대는 출동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당장 긴급 출동이 필요한 코드0, 코드1로 분류한 신고 건수는 총 8건인데, 이중 출동은 1건밖에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총체적 부실 대응이 드러난 가운데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날 오전 '이태원 사고 관련 언론 브리핑'을 열고 "관계기관장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또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현장의 심각성을 알리는 112신고가 다수 있었던 점을 확인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12신고를 처리하는 현장의 대응은 미흡했다는 판단을 했다"라고 말했다. 112신고 내역 공개 방침을 밝힌 것도 이날 브리핑에서다.
일각에서는 윤 청장이 112신고 대처 미흡을 밝히고 내역 공개에 선제적으로 나선 것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는 분석과 함께, 속도감 있는 대응을 통해 의혹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행보였다는 시각이 제기되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국회를 통한 자료 공개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먼저 조직 차원에서 자료 공개를 하고, 진상 규명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가 담긴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경찰청 관계자는 "사안이 워낙 큰 만큼 진상 규명과 내부 감찰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며 "더 의혹이 커지기 전에, 진상 규명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내부 공감대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112신고 녹취록 공개 배경에 대해 갖가지 해석이 잇따르자 경찰청은 이날 오후 "녹취록을 공개하게 된 것은 앞으로 뼈를 깎는 각오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공식 입장을 냈다.
결국 향후 경찰의 대책은 내부 진상 규명에 감찰에 맞춰질 전망이다. 윤 청장은 '읍참마속'을 언급하며 "이번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 모든 부분에 대해 예외 없이 강도 높은 감찰과 수사를 신속하고 엄밀하게 진행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전반적인 사건 경위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칼 끝을 내부로 돌려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한 셈이다. 당장 경찰청은 이날 사고 당일 현장 이태원의 안전 관리를 담당한 서울 용산경찰서에 인력을 투입해 감찰에 착수했다.
경찰청은 수사의 독립성이 보장된 '특별수사본부'를 꾸리겠다고도 밝혔다. 진상 규명을 위해 이미 서울경찰청 수사본부가 설치돼 있지만 이를 경찰청 차원으로 격상해 전환한 셈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특수본부장은 그 직무에 관하여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수사하여 수사 결과만을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감안하면 향후 내부 감찰 칼 끝이 일선 뿐만 아니라 지휘부까지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12신고의 경우 시도경찰청까지 접수되기 때문에 용산서 뿐만 아니라 서울경찰청에 책임을 물을 여지가 충분하다.
특수본은 손제한 경무관(경남청 창원중부서장)을 본부장으로 총 501명을 편성한 상태다. 손 경무관은 경찰대학 7기로 1991년 경찰에 임관했으며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경찰청 수사과장,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장 등을 거쳐 경찰 내 '수사통'으로 꼽힌다. 지난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 사건 수사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은 바 있다.
손 신임 특수본부장은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무겁게 인식하고 있으며, 한 점 의혹이 없도록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감찰, 수사 향방과 여론에 따라 수뇌부 책임론은 최종적으로 경찰 수장에게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경우 사퇴론이 정치권에서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윤 청장은 부실 대응 책임을 지고 사퇴 의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우선 현 상황에서 현안 해결과 사고 수습,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며 "청장으로서 그 부분 중점을 두고 대응하겠단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결과 나왔을 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시점이 됐건 그에 상응한 처신을 하겠다고 말씀을 대신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