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태원 압사 참사'의 심리적 상흔이 확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건의 직접적 관계자인 피해 유족들, 생존자 외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는 국민들도 두통과 무력감을 호소하는가 하면 일상적인 출근길에서도 공포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나 화재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핼러윈'(Halloween)을 맞아 주말을 즐기러 나간 젊은층이 급작스럽게 무더기로 희생된 '사회적 재난'이라는 점이 집단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핼러윈 데이를 목전에 두고 있었던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을 찾은 40대 남성 A씨는 이날 사고 장소인 해밀톤 호텔 골목 부근에서 아내와 점심식사를 했다. 느지막한 오후까지 주변 카페에 머물렀던 A씨는 인파가 본격적으로 몰리기 전 이태원을 빠져나왔다.
불면증으로 잠자리를 뒤척이고 있을 때 울린 스마트폰의 기척은 '재난 문자'였다. "[서울특별시청]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인근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통제 중입니다. 인명사고 우려로 해당지역 접근자제 부탁드립니다."(10월 30일 0시 4분) 아침이 밝기까지 사고를 알리며 신속 귀가를 당부하는 네 통의 문자가 더 들어왔다.
A씨는 그 이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는 있지만, 확실히 다른 상태라고 느낀다.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엄마 B씨는 스스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계속 TV만 틀면 참사 뉴스를 보게 된다. 사고 당일, 아이를 데리고 이태원을 한 번 들러볼까 했던 남편의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사정상 실제 이태원을 방문하진 않았지만, '내 가족'과 동떨어진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유다.
마음이 여린 아들은 그가 뉴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제발 이런 거 보지 말자", "무섭다"며 쪼르르 달려와 TV를 끄기 일쑤다. 방송 매체들이 참사 현장영상을 자체 '모자이크' 처리하는 등 자극적인 보도 자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영상세대인 아이들이 이를 접하고 받는 충격은 성인들과 또 다르다는 게 B씨의 새삼스러운 자각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지하철 2호선에 올라타는 30대 여성 C씨는 요즘 문자 그대로 숨이 막힌다. 이전이라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것도, 인구 밀도가 급상승한 것도 아닌데 체감하는 갑갑함이 달라졌다. 얼마 전 환승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올 때는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손발이 저리는 등 공황장애와 비슷한 증상이 찾아오기도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사'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엄습한 순간이다.
일각에서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동급생을 잃은 경험이 있는 20대의 집단 트라우마가 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집계된 이태원 참사 사망자 156명 중 104명이 20대로 파악됐다. 66.7%로 압도적인 비중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이달 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8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 이 10대들, 그 나이대 친구들은 굉장히 이른 나이에 트라우마 경험을 한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같은 연령대의 친구들이 또 이런 참사를 당하는 모습을 계속 누적해서 보게 되는 세대가 되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언론에서 흔히 인용되는 '트라우마'(trauma)는 상당히 전문적인 개념이다. 지난 2013년 개정된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 5판(DSM-5) 진단기준에 따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는 한 가지 이상의 외상성 사건에 노출되어 나타나는 특징적 증상의 발달이다.
미국 심리학회(APA)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을 ①직접적으로 경험한 외상성 사건 ②목격한 외상성 사건 ③가까운 친척 또는 친구에게 일어난 경험에 따라 간접적으로 노출된 외상성 사건 등 3가지로 분류한다.
1번에는 전투원 또는 시민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전쟁, 신체적 공격과 약탈·강도·아동기 신체적 학대, 성폭력, 납치, 인질, 테러 공격, 자연적이거나 인간이 일으킨 재앙 등이 들어간다. 2번은 위협적이거나 심각한 부상, 비정상적 죽음, 폭력적 폭행에 의한 타인의 신체적 또는 성적 학대, 가정폭력, 전쟁·재앙 등에 대한 목격을 아우른다. 3번 범주도, 폭력적인 경험이거나 돌발적인 경험에 국한되며 극심한 개인적 폭행, 자살, 심각한 사고 및 부상을 포함한다.
PTSD의 임상적 증상은 외상성 사건과 관련한 △침습적 증상 △회피 증상 △부정적 인지·감정의 변화 △과각성 등 4가지로 나뉜다. 이같은 증상(들)이 한 달 이상 지속될 때 의학계에선 PTSD 진단을 내리고 있다.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는 참사 유족, 생존자(목격자), 희생자와 친밀한 관계 등에 해당된다. 좀 더 넓게는 현장출동 소방·경찰 등 구조인력, 관련 업무 종사자도 포함된다. 다만, 이번 참사의 경우 서울 중심가 거리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더해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일반 시민들이 받는 충격도 더 클 수밖에 없다.
참사 속보가 처음 전해진 초기, 트위터 등 SNS(사회관계망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심정지로 심폐소생술(CPR)을 받는 사상자들의 사진·영상 등이 게시된 것도 한몫했다.
심민영 센터장은 "일반 국민들의 SNS를 통한 (참사 관련) 노출은 교과서적인 정의상으로는 트라우마의 노출로 포함되진 않는다"면서도 개중에 당사자에 준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에 대해 "간접적인 노출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참사의 물리적 수습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의 '조기 대처'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 중엔 자신이 PTSD라는 사실조차 인지를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는 참사 이튿날인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의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과 생존자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특히 중요한 것은 생존자와 유가족, 목격자, 그 외 관련된 많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마음의 고통,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생존자는 참사 후 불안과 공포, 공황, 우울, 무력감, 분노, 해리증상 등 트라우마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며 저절로 회복될 수 있다"며 "단, 고통이 심하고 일상생활이 힘들다면 즉시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라"고 권고했다.
유가족에 대해서도 "원망과 분노, 죄책감에 휩싸일 수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이 고인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당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가족, 친척, 친구와 함께 고통을 나누라"고 조언했다.
전반적으로 근거 없는 혐오를 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놀러간 사람들을 왜 추모하고 지원해야 하냐'는 등 희생자들에게 화살을 돌려 유족에게 대못을 박는 표현은 절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나래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그런 글을 올리는 것은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만드는 부분이고, 쉽게 말하면 예의가 아니다"라며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더라도 일단은 마음을 정리하는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상자들을 두고 '유흥을 위해 위험을 자초한 철없는 이들'로 치부하는 것도 부적절한 비난이라고 했다. 홍 교수는 "사실 (어디에서든) 놀러갔다가도 죽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며 "(희생자를 특정 카테고리로) 나누는 것 자체가 제가 보기엔 틀린 얘기"라고 밝혔다.
예기치 못한 상실로 느끼는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주변에서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홍 교수는 "지금 당장은 (사건 직후) 급성기라서 많이 힘드실 것"이라며 유족 등에게 섣부른 조언 자체가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상가집에서 상주가 울고 있으면 '울지 말라', '버텨야 된다'고 하지만, 힘들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지 않는 게 필요하다"며 "충분히 울고, 충분히 그 감정을 느껴야 한다. 제일 잘못된 애도는 (감정을 억제해)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는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지지와 위로"라는 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권면과 상통한다.
홍 교수는 온라인 상 관련 뉴스·자료의 무분별한 '퍼나르기'를 자제하고 일종의 '선플'(선(善)한 리플) 운동처럼 참사 당시 시민들의 적극적 구조 참여 등을 더 널리 공유하자고도 제안했다. 정제되지 못한 허위정보 등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시민들도 불필요한 상처를 더 받게 된다는 취지다.
그는 "일단 조금 정확한 정보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떠도는 정보들은 차단을 해주시는 것도 필요하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뉴스 등은 정보를 공유할 때 '이게 정말 맞는 내용인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부분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CPR에 나선 것도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우리가 잘 대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서로 관심을 갖고, 고마움을 표현하고, 힘든 것들을 나누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회복을 위한 가용 통로를 알아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보건복지부는 전날부터 참사 유가족 등의 심리 안정 지원을 위해 서울시 합동분향소 인근 서울광장 서울도서관 정문 앞(오전 9시~오후 6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광장(오전 9시 반~오후 5시 반)에서 '마음안심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마음안심버스에서는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이태원 통합심리지원단이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정신건강 검진 및 상담을 진행한다. 유가족과 부상자, 기타 상담 희망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서울시 등 지자체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유족 외 일반 시민들에게 심리 상담 및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임상심리학회도 "국가 애도기간 및 특별 재난지역 선포 등의 정부 대처에 맞춰 심리지원 서비스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며 "한국심리학회 재난심리위원회에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진행하는 '무료 전화상담 서비스'(1670-5724)에 공조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