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리본' 놓고 우왕좌왕 정부…애꿎은 지자체만 '혼란'

1일 정부, 謹弔 문구 지침 번복
참사 이튿날 글씨 없는 리본 지시
지자체들, 검정 리본 마련에 진땀
오락가락 지침 변경에 의혹만 무성
인사처·행안부 "통일성 위한 지침"
전문가 "이미 근조문구는 통일돼"
납득 불가한 해명, 애도 의미 반감

한덕수 국무총리가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이태원 압사 참사'와 관련, 관계 부처 장관들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이튿날인 지난달 30일, 경기도 내 한 지자체 총무과 직원 A씨는 행정안전부의 공문 속 한 줄을 보고 황당했다.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을 착용 바란다'는 문구였다.
 
"평소 비축해둔 근조 리본에는 다 한자가 새겨져 있거든요. 뜬금없이 글자 없는 걸 써야 한다고 위에서 지시하니까…"
 
결국 A씨는 공문 접수 바로 다음 날, 납품업체에 문구를 새기지 않은 검정 리본을 대량 주문했다. 본청은 물론, 시 산하기관 공무원들까지 감안해 수량은 5천매에 달한다.
 
그는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미 주문을 다 넣은 상태라 물릴 수도 없다"며 "우선 사용하고 남은 물량들은 나중에 또 사용하든가 해야 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례적인 지침" 공직사회 혼란 확산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한 근조 리본과 관련해 정부가 '글자 없는 리본을 착용하라'고 했다가 '글자가 있어도 된다'고 오락가락하면서 일선 지자체들의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1일 인사혁신처는 설명자료를 내고 "이태원 사고에 대한 애도를 표할 수 있는 검은색 리본이면 글씨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검은색 리본 패용 안내 후 관련 문의가 많아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으로 패용하라고 설명했던 것"이라며 "복무 기강확립과 애도 분위기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존 검은색 리본 패용 지침으로 불필요한 행정이라거나 애도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이 같은 논란에 선을 그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행안부는 글자 없는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문을 보낸 당시 이에 대한 이유는 기재하지 않았다. 일선 공무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예도리본(안)'에 대한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
 
31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이로 인해 각 지자체 공직사회에서는 애도 표시에 대한 이례적인 '일방 지침'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글씨가 적히지 않은 근조 리본을 미처 갖추지 못해, A시처럼 신규 구매하거나 기존 근조 리본을 뒤집어 착용하는 데 급급했다.
 
수원특례시공무원노동조합 관계자는 "과거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 일관성 없이 기준을 너무 막 내려 보낸다"며 "근조라는 문구가 통상적으로 쓰는 애도의 의미가 담긴 것인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글씨 없는 검정 리본을 달라고 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어떤 사고든 사망하지 않고 부상만 당한 분들이 계실 수 있는 것인데, 이를 의식해 근조 글씨는 안 된다는 일각의 해석도 납득할 수 없는 궤변"이라며 "면밀한 검토도 없이 이런 우왕좌왕 지침을 내리니까 공무원들만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이날 인사혁신처에서 글자가 적힌 근조 리본도 허용한다고 기존 지침을 번복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각 지자체에서는 인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또 다른 도내 지자체 관계자는 "근조 리본에 글씨가 있으면 안 된다는 지침을 받아서 의아했다"며 "공문 내려온 이후에 (지침이) 바뀐 건 전혀 모른다. 아직 얘길 못 들었다"고 말했다.
 

정부 "통일성 이유로"…전문가들 "이미 통일됐는데"

 


이처럼 지자체들이 큰 혼란을 겪게 됐는데도, 관계 정부부처는 애초 글씨 없는 근조 리본에 대한 지침이 내려진 구체적 경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행안부 관계자는 CBS 노컷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인사혁신처에서는 (첫 공문 발송 이후) '통일성'을 위해 지침을 냈다고 한다"면서도 "구체적으로 왜 통일성을 이유로 들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고 했다. 내부 지침을 있는 그대로 지자체에 전달만 했을 뿐, 근본 취지는 정부부처인 자신들도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애도기간을 설정한 주체인 국가가 되레 불필요한 논란만 부추겨, 자칫 애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만 낳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통상적으로 쓰는 근조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했던 배경에는 대통령실을 비롯한 소위 '윗선'의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며 "관행대로 하면 되는데 특별한 지시가 내려가고 그것을 번복하는 과정이 혼란을 조장하면서 애도의 의미만 반감됐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성완 시사평론가는 "지자체는 근조 리본을 만들어서 보관해 놓고 재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통일돼 있는데, 통일성을 위해 문구가 없는 리본을 쓰라고 했던 것 자체가 석연치 않다"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 의심을 사게 되는 것인데, 정부 스스로가 종교적인 음모론을 양산하는 행태를 반복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판단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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