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공권력"…이태원 참사, '인현동 참사'와 판박이

이태원 압사 참사를 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수사본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들이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을 합동감식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인천 인현동 참사가 발생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이 사회는 변한 게 없다. 오히려 후퇴했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공권력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줬다."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에서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두고 홍예문(門)문화연구소 장한섬 대표가 한 평가다. 장 대표가 속한 홍예문 문화연구소는 올해 9월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기록과 생존자들의 기억을 모은 '인천 미래기억채집" 1999 인현동 화재 참사 기록'을 출간했다.
 

"청소년·청년 소통 공간에서 발생한 참사"


장 대표는 이태원 참사가 23년 전 발생한 인현동 참사와 비교해보면 '행정과 공권력의 무능'이 사고 발생 원인 중 하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의 희생자는 청소년이었고,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는 청년"이었다면서 "인현동 참사 당시 청소년들은 학교 축제가 끝난 뒤 학교 밖에서 놀 공간을 찾다가 인현동 호프집으로 모인 반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자본과 시장이 만든 이태원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두 참사는 10대와 20대가 또래들과 만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할 공간을 찾기 위해 찾은 곳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라며 "인현동 호프집과 이태원은 당시 청소년과 현재 청년에게 유일한 문화적 탈출구였지만 그 탈출구는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핼러윈이 외국 문화라는 점에서 일부 시민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청년들이 함께할 기회와 공간이 많지 않은 사회 구조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청소년이 주점을 왜? 축제 간 게 잘못'…여전히 희생자를 비난하는 사회

1999년 10월 30일 화재가 발생한 인천 인현동 호프집 모습. 연합뉴스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는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 한 호프집 건물 지하 1층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다. 이 사고로 56명이 숨지고 78명이 다쳤다. 정부 수립 이래 3번째 규모의 대형 화재 사고다.
 
사망자 대부분이 이 건물 2층 호프집에서 나왔는데 이 주점은 당시 무허가 영업과 미성년자 주류 판매 등 불법을 자행하던 곳이었다. 영업 정지 처분을 받고 폐쇄돼야 했지만, 호프집 주인이 지역 공무원과 경찰 등에게 뇌물을 제공하며 회유해 영업을 묵인하던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당시 호프집 주인은 대피하려던 학생들에게 '돈 내고 가라'며 유일한 출입구를 막고 혼자 도망쳤다. 30분 만에 화재가 진압됐음에도 사망자가 많이 나온 이유다. 사망자 대부분은 10대 청소년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인현동 화재 참사를 '미성년자들이 호프집에 간 탓에 벌어진 개인의 일탈'이라고 낙인찍었다. 비난의 화살을 희생자에 집중한 것이다. 후진적 인명사고가 벌어진 원인이나 대책에 대한 논의는 뒷전을 밀렸다.
 
이태원 참사는 지난달 29일 오후 10시15분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호텔 옆 골목에 모여 있던 인파 중 일부가 넘어지면서 발생한 압사 사고다. 핼러원을 앞둔 주말 밤 비좁은 골목에 인파가 몰리면서 피해가 커졌다. 이 사고로 1일 현재 156명이 숨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축제를 즐기러 왔던 20대로 확인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그곳에 간 게 잘못"이라는 비난과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장한섬 대표는 "인현동 참사는 공권력 부패로 발생해 은폐·축소됐다면, 이태원 참사는 공권력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공권력의 무능으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23년이 지난 뒤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보는 사회의 시선도 인현동 화재 참사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대부분이 축제를 즐기러 갔던 20대로 확인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그곳에 간 게 잘못"이라는 비난과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핼러윈을 즐기라고 했던 사회…안전하게 즐길 수 있게 해줬어야"


인현동 화재 참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들은 이태원 참사가 인현동 화재 참사 때처럼 사고 원인을 '개인의 일탈'로 몰아가면 재발 방지를 위한 논의는 뒤로 밀려나고, 사회적 갈등만 야기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인현동 학생 화재 참사 유족회 이재원 회장은 "인현동 화재 참사 때도 여론은 숨진 아이들을 향해 '청소년이 갈 수 없는 곳을 갔다'는 등 비행청소년을 몰아갔다"며 "이번 참사를 보면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회가 먼저 청년들에게 '핼러윈'을 홍보하고 즐기라고 종용했다"며 "행정과 정치는 청년들이 핼러윈을 더 안전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줬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금도 서로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하는 것 같다"며 "사고를 수습하고 재발방지책을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반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태원 생존자 "사전 계획·경찰·비상서비스 있었다면 비극 막았을 것"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도 이번 참사에 공권력이 좀 더 적극적인 준비를 마련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호주 국적의 네이선 테버니티(Nathan Taverniti·24)는 동영상 플랫폼 틱톡을 통해 이태원 참사에 대해 "갑자기 우르르 몰려온 사고가 아닌 천천히 몰려오는 고통스러운 압박으로 사람들이 깔려 숨졌다"며 "사전 계획, 경찰력, 비상 서비스가 전혀 없어 아무도 도울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틱톡 영상은 영국의 데일리텔레그래프와 가디언 등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이 비중있게 다뤘다.
 
그는 "이번 참사는 술에 취한 인파로 벌어진 사고도 아니었다"며 "수많은 인파의 운집에 대해 적절하게 사전 계획이 있었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테버니티는 참사 당시 외국인 친구들과 이태원을 찾았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군중 속에서 빠져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같은 국적의 그레이스 레이체드(Grace Rached·23)는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친구들도 중상을 입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호주 국적의 네이선 테버니티(Nathan Taverniti·24)가 올린 틱톡 영상. 틱톡 화면 캡쳐
 

경찰청장 "사고 직전 심각성 알리는 112 신고 다수…대응 미흡했다"


경찰도 스스로 무능을 인정했다. 경찰청은 전날 이태원 참사 당일 사고 이전에 접수받은 112신고 접수 녹취록을 공개했다. 참사 이전까지 경찰은 서울 이태원역 해밀톤호텔 인근 지역에서 11건의 신고를 접수했다. 접수 시간대는 오후 6시 34분부터 10시 11분까지였다.
 
신고내용을 보면 다급하게 압사 우려를 전달하고 경찰의 대응을 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특히 6시 34분 녹취록을 보면 신고자는 "골목 사람들하고 오르고 내려오고 하는 데 너무 불안하다 사람이 내려올 수 없는 데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당할 것 같다"며 "아무도 통제를 안한다. 경찰이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 9시에 접수된 신고에는 더욱 급박한 상황이 담겼다. 신고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압사당할 것 같다", "아수라장이다", "대형 사고 나기 일보 직전이다. 통제해야 한다"고 거듭 신고했다. 또 "여기 진짜 길 어떻게든 해주세요. 진짜 사람 죽을 것 같아요"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출동해서 확인해 보겠다"는 답볍만 반복했다. 사고 발생 3시간여 전부터 '구조 요청'이 있었지만, 경찰은 해당 신고들을 모두 종결 처리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1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이태원 참사' 관련 입장을 표명을 표명하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희근 경찰청장은 전날 브리핑을 열어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현장의 심각성을 알리는 112신고가 다수 있었던 점을 확인했다"며 "신고 내용을 보면 사고 발생 이전부터 많은 군중이 몰려 사고의 위험성을 알리는 급박한 내용들이었지만 112신고를 처리하는 현장의 대응은 미흡했다"고 사과했다.
 
그래픽=김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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