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화염과 분노'보다 심각…출구가 안 보인다[한반도 리뷰]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측에 자라난 풀들이 한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해외에서 바라본 대한민국 상황은 정말 일촉즉발의 위기다. 교민과 주재원, 외교관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저한테 질문도 했다. '전쟁 나는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해외공관에 대한 국감 결과를 전하며 정부의 비상한 경각심을 촉구했다. 실제로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2017년 이후 5년 만에 또 다시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2017년 전쟁 위기는 당시에도 충분히 체감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정작 태풍의 한복판에 있던 우리로선 상황을 잘 몰랐던 것이다.
 
미국 기자 밥 우드워드는 저서 '격노'에서 당시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워싱턴의 성당을 여러 차례 찾아가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전했다.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모든 군사행동의 선택 방안을 검토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북한에 직설적으로 경고했다. 북미 간에는 '핵 단추'의 크기를 놓고 위협적인 설전도 오갔다.
 
매티스의 후임인 마크 에스퍼 장관은 회고록에서 2018년 1월 주한미군 가족 등에 대한 철수 작전(NEO)이 발표 직전 취소됐다고 밝혔을 정도다. 그야 말로 진짜 위기였던 셈이다.

 

트럼프-김정은 기 싸움에 일촉즉발…文정부의 완충 역할로 숨구멍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현 한반도 상황도 그때에 못지않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더욱 위험하다. 2017년 위기는 트럼프라는 거칠고 독특한 성정의 미국 대통령, 그리고 이에 전혀 밀리지 않으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기 싸움 성격이 짙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전통적 수법인 '미치광이 전술'을 역이용하며 거의 비이성적 수준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어른들의 축'으로 불렸던 합리적인 참모들이 트럼프의 충동 성향을 어렵사리 제어함으로써 파국을 피해갔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백악관 참모들이 뜯어 말리기도 했지만 트럼프의 군사적 옵션은 대북 압박 차원이었지 실제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문재인 정부의 필사적인 중재‧완충 역할이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무력 사용은 우리 동의 없이 불가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천명했다.
 
2017년 12월에는 미국 방송과의 KTX내 인터뷰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로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할 것을 미측에 제안한 사실을 전격 공개하는 등 전쟁의 불씨를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번엔 한국이 강경노선 주도…중‧러도 멀어지며 중재자 사라져


북한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지켜보는 시민들. 연합뉴스

이는 한국 정부가 오히려 전면에 나서 대북 강경노선을 주도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정부는 지난 8월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부활에 이어 동해 한미일 합동훈련을 비롯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고 있다.
 
31일부터는 한미 군용기 240여대를 동원한 대대적인 훈련도 예정된 가운데 북한은 28일 2주만에 탄도미사일 발사를 재개하며 벌써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2017년 당시 미국 합참의장이던 마이클 멀린은 최근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5년 전보다 핵전쟁 위험이 더 커졌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협상용이 아니라 실제로 쏠 수 있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거듭 가능성을 확인했다.
 
여기에다 2017년 무렵만 하더라도 유엔 대북제재에 겉으로나마 협조하는 듯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안보리 대북 규탄성명조차 불발됐고 북한의 7차 핵실험 시에도 추가 제재가 어려운 형국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 능력은 미국 항공모함 증원군을 노골적으로 위협할 만큼 향상됐다. 군사적 의지 면에서도 일전불사를 외치며 공격적인 핵 교리를 법제화했다. 중국 20차 당대회 기간에도 도발을 이어가며 중국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는 게 그 방증이다.
 
북한은 특히 2019년 '하노이 노딜'의 수모를 최고 지도자가 겪음으로써 미국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친서라도 오가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에는 대립과 대결로 일관하고 있다.

 

우크라전 장기화 등 세계정세도 불안정…현상유지로 상황 관리 급선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이처럼 5년 전과는 판이한 한반도 정세는 폭발적 긴장을 완화할 작은 숨구멍조차 꽁꽁 막아놓고 있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기류가 강화되고 양 진영의 원심력이 커지면서 싸움을 말리고 나서는 자가 없는 것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금이 2017년 위기에 버금간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평창올림픽으로 상황이 급반전했던 2017년과 달리 반전의 소재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11월 8일 미국 중간선거 이후 바이든 행정부 대북정책의 변화 가능성을 주목하지만 큰 기대는 하기 어렵다.
 
미국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 전망이어서 한반도로 눈을 돌릴 여력이 별로 없다. 또한 중간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현재 미국 의회는 중국과 러시아 문제에 대체로 초당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현 한반도 상황은 매우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맞물려 2017년보다 더한 위기 국면으로 치닫거나, 아니면 위험 수위는 다소 낮지만 소모적 대결이 지속되는 장기 교착상태의 늪에 빠질 수 있다.
 
김 교수는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의 2022년 버전"이라면서 "미국은 큰 사고만 안 터진다면 (우선순위가 낮은) 한반도 문제를 당분간 이대로 방치하고 갈 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여건을 냉정히 따져본다고 해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란 우리 정부의 당위적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부는 북한에 원칙적 대응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상유지를 통해 상황의 추가 악화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 뿐 아니라 한중협력을 통해 최소한의 대북 지렛대를 만드는 게 불가피하다.
 
다소 상충되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보수‧진보를 떠나 한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자 숙명이기 때문이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