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자 국내에서도 수많은 팬들을 '헤결앓이'하게 만든 영화 '헤어질 결심'의 첫 번째 신(scene)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을 여는 중요한 장면이자 이후 많은 이야기가 담길 제일 첫 신을 써 내려가는 건 정서경 작가에게도 어려운 작업이다.
그는 "1신(scene)은 쓰기 힘들다. 힘든 게 정상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못 쓴다는 걸 받아들이고 쓰면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다"며 글쓰기를 결심하는 자신만의 방법부터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2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홍릉 콘텐츠 인재캠퍼스 3층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2 콘텐츠 인사이트'의 첫 번째 프로그램 '세계관의 탄생-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새로운 IP(지식재산권)를 탄생시킨 거장'에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의 영화는 물론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정서경 작가가 참석해 '나는 왜 쓰는가?-작가 정서경, 창작할 결심'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을 만든 사람들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프란츠 카프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여기까지가 정서경 작가의 표현대로 하면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 1진'의 목록이다. 안데르센부터 시작해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의 삶에 자양분을 제공한 게 '작가 1진'과 그들의 작품이라면, 정서경을 지금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존재하게 만든 건 박찬욱 감독이다.
정 작가는 "박찬욱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시나리오 작가로서 난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 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난 박찬욱 학교의 학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박 감독님과 작업하며 사소한 것까지 많이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시나리오 초고를 박찬욱 감독에게 건네면 박 감독은 말하지 않고 앉아서 고치기 시작했다. 수천 번의 승인 과정을 거치는데, 그 자체가 배움의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시나리오 작업할 때 하나의 컴퓨터에 두 개의 키보드를 연결해 같이 글을 쓰는 걸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아가씨'의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대사에서 "나를 망치러 온"은 정 작가가 "나의 구원자"는 박 감독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는 대사에서 "희망을 버려"는 정 작가가 "그리고 힘내"는 박 감독이 쓰는 식이다.
이러한 협업은 '친절한 금자씨'부터 시작됐다. 식탁 양 끝에 앉아 스태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키보드를 누르는 작업은 마치 탁구 경기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모니터, 두 개의 키보드'라는 낯설고도 독특한 방식이 가능한 건 초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 작가는 장점만 있을 뿐 단점을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전 그때 아무 경력이 없는 작가였고 감독님은 칸에서 상을 탄 세계적 거장이었어요. 감독님께 직접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용히 딜리트(삭제) 키를 누르고 새로 쓸 수는 있었어요. 쓸데없는 설득과 논쟁을 하지 않고 조용히 키보드를 쳐서 내 생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죠. 상대방이 조용히 고쳐서 좋으면 넘어가고 아닌 거 같으면 고치는 거예요."
정서경 작가가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정말정말 똑똑하면 반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가, 반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로 기억될 수 있으니까. (중략) 그래서 기자가 됐다. 기자는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 앞에서도 쫄지 않고 당당하게 질문할 수 있으니까. _드라마 '작은 아씨들' 오인경 캐릭터 설명 중
'작은 아씨들'의 오인경은 '욕망'에서 시작된 캐릭터다. 여성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남성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거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게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오인경은 유명해지거나 탁월한 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도 거대한 이야기를 맡아서 감당하고 기록하고 전할 수 있다는 욕망.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느껴 정 작가는 '기자'라는 역할을 오인경에게 줬다.
송서래는 영화의 척추에 해당하는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 살인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사건의 본질, 송서래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건 이야기의 중간에 놓여있다.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과 단계가 이야기의 주된 플롯이기에 "가장 먼저 만든 인물이 '송서래'"라고 설명했다.
반면 원상아는 "남은 플롯으로 만든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정 작가는 빌런을 만들 때 주인공의 그림자, 플롯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림자란 주인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로도 말할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의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원상아의 엄마를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나온 게 원상아다. 정 작가는 "상아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라며 "상아가 엄마를 죽이고 정란회를 폭파하며 중심으로 들어오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정서경 작가가 전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습관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정 작가는 이때 중요한 건 '마음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잘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 박으며 "1신이 쓰기 어려운 이유를 논리적으로 납득하면 편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신이 가장 쓰기 어려운 이유는 첫 번째 신에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신은 멋지지만 이걸 쓴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 역시 기대치를 낮추고 어쩔 수 없을 때 첫 신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힘든 게 정상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못쓴다는 걸 받아들이고 쓰면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 작가는 가만히 있는 시간을 통해 하나씩 생각들을 비워나가며 결국 자기 자신과 캐릭터가 남는 순간에 다다른다. 이때까지의 과정을 그는 '기다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뇌는 쉬지 않는다. 뇌에 생각이 오가는 게 보인다"며 "한 20분 정도는 잡념들이 지나간다. 그러고 나서 흙탕물이 가라앉는 것처럼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게 없을 때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시작하는 하루는 없더라고요. 사람이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습관, 정말로 혼자가 되는 것이 필요해요. 적어도 시나리오의 30% 이상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혼란, 불확실성, 갈등을 가진 상태로 혼자 있는 게 제일 좋은 습관인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