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정서경 작가가 글쓰기를 결심하는 방법

2022 콘텐츠 인사이트,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 초청 토크 콘서트

2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홍릉 콘텐츠 인재캠퍼스 3층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2 콘텐츠 인사이트'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서경 작가.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일출 직전의 파르스름한 대기와 옅은 안개. 헤드랜턴을 두른 사람들이 잡목 숲을 헤치고 돌아다니는 통에 빛줄기들이 어지러이 춤춘다. 산악 구조대원이 암벽에 늘어진 자일을 가리키자 형사들 -부산경찰청 서부경찰서 형사과 강력2팀장 장해준 경감(40대 초)과 그의 팀원 오수완 경사(30대 초), 유미지 경장(20대 말)- 머리가 일제히 그 방향으로 돌아간다." _영화 '헤어질 결심' 첫 번째 신 첫 문단, 각본집 발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자 국내에서도 수많은 팬들을 '헤결앓이'하게 만든 영화 '헤어질 결심'의 첫 번째 신(scene)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을 여는 중요한 장면이자 이후 많은 이야기가 담길 제일 첫 신을 써 내려가는 건 정서경 작가에게도 어려운 작업이다.
 
그는 "1신(scene)은 쓰기 힘들다. 힘든 게 정상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못 쓴다는 걸 받아들이고 쓰면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다"며 글쓰기를 결심하는 자신만의 방법부터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2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홍릉 콘텐츠 인재캠퍼스 3층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2 콘텐츠 인사이트'의 첫 번째 프로그램 '세계관의 탄생-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새로운 IP(지식재산권)를 탄생시킨 거장'에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의 영화는 물론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정서경 작가가 참석해 '나는 왜 쓰는가?-작가 정서경, 창작할 결심'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공동 각본 작업한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포스터. CJ ENM 제공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을 만든 사람들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프란츠 카프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여기까지가 정서경 작가의 표현대로 하면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 1진'의 목록이다. 안데르센부터 시작해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의 삶에 자양분을 제공한 게 '작가 1진'과 그들의 작품이라면, 정서경을 지금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존재하게 만든 건 박찬욱 감독이다.
 
정 작가는 "박찬욱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시나리오 작가로서 난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 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난 박찬욱 학교의 학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박 감독님과 작업하며 사소한 것까지 많이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시나리오 초고를 박찬욱 감독에게 건네면 박 감독은 말하지 않고 앉아서 고치기 시작했다. 수천 번의 승인 과정을 거치는데, 그 자체가 배움의 시간이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CJ ENM 제공
정 작가는 박찬욱 감독과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그리고 '헤어질 결심'까지 5개 작품의 각본을 함께 집필했다. 이들이 함께 만든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작품 세계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의 협업 방식이다.
 
두 사람은 시나리오 작업할 때 하나의 컴퓨터에 두 개의 키보드를 연결해 같이 글을 쓰는 걸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아가씨'의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대사에서 "나를 망치러 온"은 정 작가가 "나의 구원자"는 박 감독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는 대사에서 "희망을 버려"는 정 작가가 "그리고 힘내"는 박 감독이 쓰는 식이다.
 
이러한 협업은 '친절한 금자씨'부터 시작됐다. 식탁 양 끝에 앉아 스태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키보드를 누르는 작업은 마치 탁구 경기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모니터, 두 개의 키보드'라는 낯설고도 독특한 방식이 가능한 건 초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 작가는 장점만 있을 뿐 단점을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전 그때 아무 경력이 없는 작가였고 감독님은 칸에서 상을 탄 세계적 거장이었어요. 감독님께 직접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용히 딜리트(삭제) 키를 누르고 새로 쓸 수는 있었어요. 쓸데없는 설득과 논쟁을 하지 않고 조용히 키보드를 쳐서 내 생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죠. 상대방이 조용히 고쳐서 좋으면 넘어가고 아닌 거 같으면 고치는 거예요."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스틸컷. tvN 제공
 

정서경 작가가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정말정말 똑똑하면 반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가, 반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로 기억될 수 있으니까. (중략) 그래서 기자가 됐다. 기자는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 앞에서도 쫄지 않고 당당하게 질문할 수 있으니까. _드라마 '작은 아씨들' 오인경 캐릭터 설명 중
 
'작은 아씨들'의 오인경은 '욕망'에서 시작된 캐릭터다. 여성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남성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거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게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오인경은 유명해지거나 탁월한 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도 거대한 이야기를 맡아서 감당하고 기록하고 전할 수 있다는 욕망.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느껴 정 작가는 '기자'라는 역할을 오인경에게 줬다.
 
영화 '헤어질 결심'과 드라마 '작은 아씨들' 스틸컷. CJ ENM·tvN 제공
또 다른 예로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와 '작은 아씨들'의 원상아는 전에 보지 못한 인물이자 어딘가 비슷한 인물이지만 둘의 형성 과정은 다르다.
 
송서래는 영화의 척추에 해당하는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 살인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사건의 본질, 송서래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건 이야기의 중간에 놓여있다.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과 단계가 이야기의 주된 플롯이기에 "가장 먼저 만든 인물이 '송서래'"라고 설명했다.
 
반면 원상아는 "남은 플롯으로 만든 캐릭터"라고 표현했다. 정 작가는 빌런을 만들 때 주인공의 그림자, 플롯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림자란 주인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로도 말할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의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원상아의 엄마를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나온 게 원상아다. 정 작가는 "상아는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라며 "상아가 엄마를 죽이고 정란회를 폭파하며 중심으로 들어오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27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홍릉 콘텐츠 인재캠퍼스 3층 대강의실에서 열린 '2022 콘텐츠 인사이트'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정서경 작가.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정서경 작가가 전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습관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정 작가는 이때 중요한 건 '마음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잘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 박으며 "1신이 쓰기 어려운 이유를 논리적으로 납득하면 편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신이 가장 쓰기 어려운 이유는 첫 번째 신에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신은 멋지지만 이걸 쓴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 역시 기대치를 낮추고 어쩔 수 없을 때 첫 신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힘든 게 정상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못쓴다는 걸 받아들이고 쓰면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 작가는 가만히 있는 시간을 통해 하나씩 생각들을 비워나가며 결국 자기 자신과 캐릭터가 남는 순간에 다다른다. 이때까지의 과정을 그는 '기다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뇌는 쉬지 않는다. 뇌에 생각이 오가는 게 보인다"며 "한 20분 정도는 잡념들이 지나간다. 그러고 나서 흙탕물이 가라앉는 것처럼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게 없을 때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시작하는 하루는 없더라고요. 사람이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습관, 정말로 혼자가 되는 것이 필요해요. 적어도 시나리오의 30% 이상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혼란, 불확실성, 갈등을 가진 상태로 혼자 있는 게 제일 좋은 습관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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