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경기 침체 흐름 속에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자금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둘러싼 부실 리스크에 금융권이 휘청이고 있다. 금리상승에 따른 투자 수요 감소와 건설공사비 증가로 부동산 사업 수익성이 악화된 가운데, 사업 진행을 위한 돈마저 돌지 않으면서 건설사와 금융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불안 해소를 위해 그야말로 전방위적 대책을 잇따라 내놓은 가운데, 시장에선 긍정 평가와 함께 효과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교차한다.
'고물가‧금리인상' 부동산 경기침체…PF대출 휘청
부동산 PF 대출이란 말 그대로 부동산 사업을 진행할 때 이뤄지는 대출이다. 차주의 신용도나 담보물을 기준으로 돈을 빌려주는 일반 대출과 달리 부동산 개발 사업의 미래 수익성을 토대로 대출이 이뤄진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개발사업 시행사가 세운 특수목적법인(SPC)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진행시킨 뒤 분양대금 등 단계별 수입으로 돈을 갚는 구조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성준 의원이 한국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금융권 전체의 부동산 PF대출 잔액은 2012년 말 37조 5천억 원에서 올해 6월말 112조 2천억 원으로 3배 이상 불어났다. 부동산 가격 상승이 두드러졌던 2016년 말(48조 4천억 원)부터 작년 말(101조 9천억 원)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업계 호황과 맞물린 흐름인 셈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금융업권별 부동산 PF대출 흐름을 보면 은행의 대출 잔액은 2012년 말 24조 5천억 원에서 올해 6월 말 28조 3천억 원으로 3조 8천억 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비은행권인 보험사와 여전사, 저축은행과 증권사의 합산 잔액은 같은 기간 13조 원에서 83조 9천억 원으로 약 6.5배나 증가했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 8월 부동산금융 점검 보고서에서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저금리 기조와 풍부한 유동성 속에서 부동산 경기는 크게 상승했고, 증권을 비롯한 금융권에서도 부동산 금융을 통해 높은 이익을 향유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부동산 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된 상황인데, 투입 근거였던 '사업 수익성'은 가파른 금리인상에 따른 수요 급감과 글로벌 고물가 현상에 따른 공사비용 증대로 크게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단이다. 한국은행도 9월 금융안정 상황 보고서에서 전국의 주택종합매매가격(전월 대비)이 올해 6월부터 하락 전환(-0.01%)된 뒤 7월 -0.08%, 8월 -0.29%로 낙폭을 키우고 있다는 점을 들어 "주택 가격 고평가 인식, 대출 금리 오름세 등으로 가격 상승 기대가 약화되고 매수심리가 위축됐다"고 부동산 시장 상황을 평가했다. 8월말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수는 3만 2722채로 전월 대비 4.6% 증가했으며, 공사비 가격변동을 측정하는 건설공사비지수는 같은달 147.39로 2020년 평균(118.9) 대비 23.9% 가량 늘었다. 부동산 PF대출 부실화 우려가 번지는 배경이다.
실제로 보험사의 부동산PF 대출채권 연체율은 작년말 0.07%에서 올해 6월말 0.33%로 뛰었다. 특히 증권사의 지난 1분기 부동산PF 대출 연체율은 4.7%로 업권에서 눈에 띄는 수준이다. 1.3%였던 2019년 말 대비로도 크게 상승했다. 한국기업평가는 최근 부동산 PF대출 구조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프로젝트의 사업성이 저하되거나 분양성과가 저조할 경우 사업주체인 시행사는 대출의 상환이 불가능한 부도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설상가상 레고랜드發 자금경색까지…증권사 '도미노 불안'
부동산 사업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돈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레고랜드 사태로 번진 시장 불신은 사업 진행을 위한 자금줄까지 막아버린 모양새다. 이런 상황이 증권사들의 심각한 리스크로도 부각되는 이유는 책임을 지고 자금 융통을 해주겠다며 너도나도 공격적으로 신용보강에 나서왔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시행사는 자기자본이 토지계약금을 겨우 충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다가, 부동산 사업의 위험도 높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돈을 끌어오기가 어렵다. 이 때 증권사가 채무보증(신용보강)을 서면서 유동화증권(ABSTB, ABCP) 발행을 도와 투자자를 모으는 자금줄 역할을 해줬다. 유동화증권은 단기채로서, 만기가 도래하면 새로 발행해 이전분을 상환하는 차환이 빈번하게 이뤄지는데 만약 차환에 실패하면 증권사가 대신 물량을 떠안는 매입약정 등의 조건으로 신용보강을 하고 수수료를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지방자치단체(강원도)가 보증을 선 채권마저도 믿기 어렵다'는 인식이 시장에 급속도로 확산, 투자 수요가 급감하고 발행금리가 급등하면서 부동산PF 유동화증권의 차환 발행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이 됐다. 신용보강에 나섰던 증권사들로선 자신들이 채무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위기에 놓인 셈이다. 실제로 최근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사업비 조달을 위한 유동화증권 차환발행이 실패 위기에 놓였다가 가까스로 만기를 하루 앞두고 성공하기도 했다.
나이스신용평가의 유동화증권 발행시장 동향 자료에 따르면, 이달 18일 기준 증권사 신용보강에 의한 단기 PF유동화증권(매입약정 포함) 가운데 이달 말까지 차환발행돼야 하는 규모는 6조2천억 원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다음달에는 그 규모가 10조 7천억 원으로 더 불어날 예정이다.
보다 시야를 넓혀 자기자본 대비 PF 대출‧유동화 증권에 대한 채무보증 합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PF대출 익스포저 비율(한은 보고서)을 보면, 증권사는 2010년말 4.7%에서 올해 6월말 기준 38.7%로 상승했다. 보험사(12.6%→53.6%)와 여전사(61.5%→84.4%)도 큰 폭으로 올랐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부동산 경기 침체와 자금시장 경색 현상이 제 2금융권의 도미노 위기론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에 한은 유동성 공급 방침까지…'전방위 대책'
금융‧통화당국은 안정 대책을 잇따라 내놓으며 시장 불안 해소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직접 유동성 공급에 회의적이었던 한국은행이 27일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증권사·증권금융 등을 대상으로 약 6조원 규모의 환매조건부채권(RP)를 매입하기로 한 점은 시장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다는 평가다. 긴축기조와 상충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표도 뒤따르지만, 한은은 매입 규모가 과거에 비해 작고, 단기 유동성 공급 조치라는 논리로 선을 긋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은은 예고대로 시중은행 대출 시 담보 대상이 되는 증권(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 공공기관채도 한시적으로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은행 입장에선 은행채를 많이 발행하지 않고도 유동성 확보가 수월해져 대출이 필요한 기업과 은행채 쏠림 현상이 우려됐던 채권 시장 안정에도 일정 수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증권금융과 산업은행도 자금난에 시달리는 증권사에 5조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한 데 이어 금융위원회는 이날 무주택자‧1주택자(기존 주택 처분조건부)에 한해 15억 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도 주택담보대출을 허용한다는 내용 등을 골자 삼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까지 내놨다. 당면한 자금경색 뿐 아니라 부동산 경기침체 상황 개선까지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자본시장 연구원 이효섭 금융산업실장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금융위의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에 대해 "투자심리 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은의 RP매입은 시장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조치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즉각적인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선 신중론을 내놨다. 다만 "기대치에 맞출 경우 통화정책 기조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고심 끝에 나온 대응이라고 본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종합 대책이 쏟아진 이날도 서울 채권시장에서 만기별 국고채 금리는 모두 전 거래일 대비 소폭 상승했다. 무보증 회사채(AA-) 3년물 금리도 0.067%포인트 오른 5.62%, 91일물 기업어음(CP) 금리도 0.04%포인트 상승한 4.55%를 기록했다. 한편 미래에셋·메리츠·삼성·신한투자·키움·하나·한국투자·NH투자·KB 등 9개 대형 증권사는 업계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물량을 스스로 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금융투자협회는 이와 관련해 "세부 실행방안과 지원 규모를 조속히 결정해 실행하기로 합의했다"고 같은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