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5년간 경비원 24명 갈아치웠다…도곡동 아파트 '갑질' ②담배셔틀에 쌍욕까지…'경비원 갑질 방지법', 실효성 있나 (계속) |
#"동료 경비원은 주민 담배 심부름을 한 적도 있어요. 동료들 얘기 들어보면 애들도 와서 반말하고 그래요. 법 바뀌어도 나아진 건 없어요. 여전히 하인 부리듯 옛날 사고방식 가진 주민들이 많아요."
서울의 한 아파트에 근무하는 경비원 장재황씨는 무거운 택배가 오면 여전히 주민들 집까지 손수 가져다준다.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시행되면서 택배 배달이 법적으로 제한됐지만, 장씨 업무에 변화는 없었다. 그는 제초 작업도 맡아서 한다. 장씨는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주민들 눈치가 보여서 (그냥) 한다"고 토로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까지 도맡아 했지만, 장씨는 최근 자신을 고용한 용역업체에 불려갔다. 장씨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주민 민원이 들어왔다며 용역업체에서 다짜고짜 '업무를 열심히 하겠다'는 각서를 쓰라 했다"고 말했다.
#"경비 주제에 가르쳐? 니가 뭔데?"
경기 안산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이대현씨는 복도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아파트 고층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을 만류했다가 '다른 아파트로 가든가'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어야만 했다. 담배꽁초나 음료수병을 창밖으로 던지는 주민들을 말려도 주민들은 이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씨는 "언제 뭐가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고층을 본다"며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22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 시행 1년을 맞이한 지금도 경비원들은 여전히 '갑'들의 '갑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제한하는 업무를 여전히 수행하고 있거나, 해당 법률로 인해 오히려 업무가 늘어난 경우도 허다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비원들에 대한 폭언·폭행도 여전했다. 노무법인 사람 장용석 노무사는 "지난 8월 중순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이 폭행을 당해 찾아왔다"며 "주차를 하면 안 되는 곳에 차를 댄 주민에게 '여기에 주차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주민이 경비원을 때린 것"이라고 말했다.
'경비원 갑질 방지법' 시행 1년…바뀐 것 없다
지난해 10월 21일부터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라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됐다. 경비원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해 경비노동자들이 부당한 지시에 시달리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였다. 국토교통부는 해당 법률의 취지를 '경비원들이 안전하고 존중받는 근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한 것'이라고 밝혔다.
위 사례들에 언급된 제초 작업, 고지서 개별 배부 및 관리사무소 업무 보조, 개별세대 택배물 배달 등의 업무들은 모두 '경비원 갑질 방지법'상 '제한 업무'로 분류됐다.
하지만 경비원들에게 제한된 업무를 지시하더라도 곧바로 처벌하는 것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해당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지자체장이 조사를 해서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그럼에도 시정하지 않으면 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가 가능하긴 하지만 곧바로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안성식 중구노동자종합지원센터장은 "개정안 시행 이후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하는 경비원이 상당수"라며 "개정안 시행 전에는 방화문 200개를 모두 페인트로 칠하라는 걸 거부했더니 해고당한 경비원도 있었고, 아파트 근처에 담을 만드는데 땅을 파라는 지시를 받은 경비원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때와 별반 달라진 바 없다"고 말했다. 경비원 장재황씨도 "(이제) 안 해도 되는 일을 마땅히 해달라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며 "어쩔 수 없이 서비스 차원에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늘부터 나무 물 줘라" 오히려 늘어난 업무…'갑질 합법화' 지적 나와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오히려 '갑질의 합법화'를 불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법률은 경비원이 해서는 안 되는 '제한 업무'를 열거하는 동시에 '허용 업무'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비노동자가 하지 않아도 됐던 일이라 하더라도 '허용 업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택배 보관, 분리수거 등의 업무들을 추가로 하게 됐다는 것이다.경비업법에 따르면 경비 업무를 위험 발생을 방지하는 업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택배 보관이나 분리수거는 이와 무관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경비노동자에게 '경비 업무' 외에 분리수거나 택배 보관 등 '관리 업무'를 시키는 것은 경비업법을 위반한 행위라는 법원의 판결(수원지방법원 2019구합62681)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시행되면서, 분리수거나 택배 보관 등 일부 '관리 업무'가 '허용 업무'로 분류돼 경비원들이 맡게 되면서 업무가 오히려 과중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주차 관리나 택배 보관 등의 업무가 경비원의 일인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성식 센터장은 "구로의 한 아파트에선 (해당 법률 시행 이후) 갑자기 경비원들을 불러 모아 '오늘부터 나무에 물 주는 것은 경비원들의 업무'라고 말했다고 한다"며 "이전에 하지 않았던 업무를 맡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법률이 시행되면서 나무에 물을 주는 업무(수목 관수)가 '허용 업무'로 포함된 데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일선 현장에서 근무하는 경비원들은 업무가 과중해진 것을 체감하고 있다.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문철원씨도 "(법 시행 이후) 업무가 많이 늘어났다"며 "'안내문 게시 및 비치' 업무는 경비원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할 수 없이 한다"고 전했다. 경비원 이대현씨 또한 "개별 세대 방문해서 사인받는 일(동의서 징구)만 안하게 됐지 그 외엔 일이 오히려 늘어났다"며 "분리수거도 우리 일이 아니었는데 합법화됐다"고 말했다.
용역업체·관리사무소·입주민까지…모두가 경비원의 '갑'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경비원들에게 불필요한 업무를 당연하게 지시하고, 폭언 및 폭행을 가하는 등 '갑질'이 사라지지 않는 데에는 모두가 경비원의 '갑'으로 존재하는 '다중사용자 구조'라는 배경도 한 몫 하고 있다.
경비노동자의 '갑'이 되는 사용자는 한 명뿐이 아니다. 용역업체를 비롯해 관리사무소부터 입주자 대표회의, 심지어는 개별 입주민들 모두가 경비원의 사용자로 인식된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연구위원은 "모든 입주민이 경비원의 고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왜곡된 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갑질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완전한 '을'로 존재하는 경비원들은 자연스레 모든 '갑'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천안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홍창선씨는 "주민들이 늦은 밤 주차할 자리가 없다고 전화하면 '내 차 뺄 테니 주차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며 "우리(경비원) 차는 아파트 바깥 골목이나 어디 갖다 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들한텐 그런 거(갑질) 당했다고 말 못 해요. '(근무 환경이) 너무 편안하다, 좋다'고 그러고 말죠 뭐. 그런 얘기 하고 있으면 어쩔 땐 울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