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직접 투표로 시장을 뽑기 시작한 것은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1990년대 이후로 그 전에는 전부 정부(대통령)가 도지사나 시장을 임명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도지사인 관찰사나 서울시장 겪인 한성판윤을 당연히 왕이 임명했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수도인 한성의 수장이었던 한성판윤 1079명의 인물됨과 행적을 무려 1500페이지에 담아낸 책 '한성판윤'(최종인 편저)이 눈길을 끈다.
사법권까지 가져 오늘날 서울특별시장보다 되레 더 큰 권한을 휘둘렀던 인물들에 대한 방대한 탐구집이자 인물기록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평가할 만한 행적도 없이 그저 한때 벼슬을 했다는 이름만 남겼거나 한성판윤을 거쳐 정승에 올랐던 유수의 인물들 모두 현대의 목민관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조선 개국 후 판한성부사로 불렸던 1대 성석린부터 2209대 한성판윤을 지냈던 장헌식까지 1079명의 신상정보와 행적, 평가를 담고 있다.
연임하거나 4~5대를 역임한 이부터 수일에서 수 시간만에 목이 날아간 판윤도 많아 댓수로는 2천대가 넘고 500년간 1천명 이상이 직을 맡아 평균 재임 기간은 6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초대 한성판윤(판한성부사)은 고려조 중신인 성석린이었다. 조선 개국공신인 그는 한성판윤을 거쳐 좌우 정승 및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조까지 86세로 장수했다.
재임하는 동안 경복궁과 종묘 및 도성 축조 등 수많은 건설사업이 있었지만 왕조실록 등에는 사고의 기록이 없다.
합리적인 건설행정을 펼쳤고 재정조달과 인력동원 등에 무리가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세종 때 6개월 가량 재직한 51대 판윤 허주는 성품이 강직해 공사를 공정하게 처리했고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 반듯하게 앉아서 사람을 대했다. 특히 노비변정도감도청사를 맡아 노비소송사건을 공정히 처결한 것으로 기록됐다.
231대와 234, 235, 239대 한성판윤을 지낸 권벌은 독서를 좋아해 항상 책을 품속에 지니고 다녔고, 337대 윤자신은 전라도 세곡선이 안흥량에서 파선되는 일이 잦아 인명피해가 막대하게 발생하자 새로운 항로 개척과 주위에 창고 설치를 건의해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또 974대 한성판윤이었던 박상덕은 이조판서에 올랐을 때 청탁 받는 덧을 수치로 여겼고 1008대 이사관은 한성판윤을 거쳤으나 막상 재상이 돼서는 일을 크게 처리하지 못해 '반식재상'으로 불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제38대 판윤 황희는 최고의 명재상이 됐고 44대 맹사성은 최고의 청백리로 꼽힌다.
반면에 137대 유자광은 서자 출신으로 세조의 신임을 얻어 남이장군을 모함해 죽음으로 내몬 간신으로 기록됐다.
2161대 이채연은 파고다공원을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며 도로정비와 하수도관로를 설치하고 위생개선사업을 하는 등 서울이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도시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한성판윤은 집권세력 내 문벌가문에서 도맡아 판서, 정승으로 가는 사실상 권력의 디딤돌이기도 했다.
성씨별로 한성판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진주 강씨, 안동 권씨, 안동 김씨, 광산 김씨, 파평 윤씨, 여흥 민씨 순서였다.
당대에 과거 합격자를 많이 내고 정승, 판서 벼슬 및 왕비를 많이 배출한 성씨와 거의 일치하는 세도 가문들이었다.
당대 공직인사의 문제였겠으나 한성판윤 역시 임명 후 사실상 집무실적도 없이 해임된 경우도 있고 1주일 만에 교체된 사례도 있었다.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후기에는 오전에 임명되고 오후에 교체되는 사례도 나타난다.
역대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들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서 전수조사해 책을 펴낸 저자는 "서울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역사 지식 전달자의 구실을 하려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책에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들의 신상기록과 행적을 집대성한 역작"이라며 "서울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징표로서 그 뜻을 시민들이 함께 나누기를 기대한다"고 축하글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