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판 삼청교육대로 불릴 정도로 공권력에 의해 잔혹한 인권 유린이 자행된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공식 인정받았다. 시설 폐쇄 후 40년 만이다.
20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8일 제43차 위원회를 통해 선감학원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선감학원 생존자들은 피해자로서 정식 인정을 받게 된다. 그동안 법적 지위가 없어 받지 못했던 국가로부터의 피해 배·보상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피해자로서의 법적 지위가 주어짐으로써 별도 개별소송 절차 없이 피해회복에 대한 지원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법 제정도 더욱 힘을 받게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도에서 3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의료비와 추모제, 피해사례 신고센터 운영 지원 등이 전부였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 결정문에서 "선감학원 수용자 전원은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사건의 피해자로 인정된다"며 "신청인 김영배 외 166명은 선감학원 피수용아동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권위주의 시기 위헌·위법적인 '부랑아 정책' 시행으로 아동 인권침해가 초래됐다는 취지로 국가의 책임을 명시했다.
특히 지난 1982년 폐원까지 운영 주체였던 점을 감안해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이 경기도에도 있다고 판단했다. 도가 법률과 조례로 정한 목적에 맞게 운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피수용아동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거나 방치한 책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무엇보다 도가 아동시설을 섬이라는 단절된 곳에 격리함으로써 아동들의 정신적, 신체적 피해와 사망사고 등의 심각한 문제를 파악하고서도 이를 방치한 점을 문제 삼았다.
이에 진실화해위는 부랑아 대책을 수립해 무분별한 단속정책을 주도한 법무부,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를 비롯해 부랑아 단속 주체였던 경찰과 선감학원을 운영했던 경기도 등을 상대로 선감학원의 피해자와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면서, 피해자의 규모를 고려해 국가는 특별법 제정 등 적절하고 합리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된다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정부와 경기도를 상대로는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신속히 확대 추진하고, 적절한 추모공간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 상태다.
권고 사항에는 △아동인권보호법 정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연구 및 치유프로그램 마련 △선감학원 유적지 보호사업 △선감학원 아동인권 침해사건과 관련된 역사기록 수정과 추가조사 등에 대한 내용도 담겼다.
진실화해위는 사건 신청인 중 이번 진실규명에 포함되지 않은 23명과 추가 진실규명신청자들을 대상으로 계속 조사를 진행해, 선감학원 수용자로 확인되면 피해자로 추가 인정할 방침이다.
이번 조사에서 진실화해위는 △부랑아 단속 규정의 위헌‧위법성 △선감학원 단속·수용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선감학원 운영과정에서의 인권침해 △퇴소 이후 트라우마 등 총체적 삶의 피해 △아동 암매장 유해 등을 밝혀냈다.
조사 신청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진행된 닷새간(9월 26~30일)의 유해 시굴에서는 5개 봉분에서 유해 일부로 추정되는 치아 68개, 유품인 단추 6개가 수습됐다.
시굴 작업을 맡은 선사문화연구원이 인류학적 조사를 한 결과, 유해는 모두 남성으로 연령대는 15~18세 정도로 추정됐다. 발견된 치아는 안정적인 구조인 머리 부분(Crown)의 에나멜만 남아 있고 뼈는 삭아 없어진 상태였다. 뼈 조직이 약한 아동들이었던 데다, 매장지 일대 토양이 산성이 강하고 수십년이 경과된 영향으로 풀이됐다.
단추의 경우 수용된 아동들이 입었던 동복의 단추이며, 백색 4혈 단추는 하복 단추인 것으로 확인됐다. 봉분 크기는 130~160㎝에 불과해 수의가 아닌 평상복을 입은 채 웅크리거나 굽혀진 자세로 머리는 북쪽을 향해 얕게 판 구덩이에 묻힌 것으로 분석됐다.
시굴단에 참여한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2017년 지표투과탐사레이더(GPR) 결과와 이번 시굴을 종합하면, 확인된 140~150기 가운데 활개가 있거나 봉분이 큰 일반인 묘는 10여기 이하로 보인다"며 "개개인 봉분마다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위는 유골 부식이 진행 중이고 원아대장의 사망자 수에 비해 봉분이 훨씬 더 많아 본격적인 신속한 '전면 발굴'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신원을 특정할 수 없는 추가 사망자에 대한 진술과 시굴에서 확인된 선감동 산37-1의 암매장 유해, 8백 명이 넘는 탈출자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사망자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진실화해위는 경찰의 일제 단속과 선감학원 강제 수용이 상위법령의 위임근거가 없는 자의적 구금으로,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한 조치로써 인간의 존엄과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봤다.
'부랑아'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법률적 정의가 내려진 바 없고, 특정한 사회적 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이들을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박해하는 행위는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 위반과 국제법상 인도(人道)에 반한 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진실화해위는 아동들의 인적 사항을 임의로 변경해 실종자가 발생하거나 가족관계와 원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사례도 파악했다. 이는 최근 CBS노컷뉴스를 통해서도 실제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보도된 바 있다.
이 외에도 진실화해위 조사 내용에는 원생들이 염전, 농사, 축산, 양잠, 석화 양식 등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 급식 양이 부족해 열매, 들풀, 곤충, 뱀, 쥐 등을 잡아먹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시설 내 학대로 심각한 신체·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사건은 해방 이후 부랑아 정책 일환으로 선감학원에서 벌어진 대규모 인권침해사건"이라며 "우리 위원회는 집단수용 시설인 서산개척단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국가의 책임있는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지방자치 시행 이전 관선 도지사 시대에 벌어진 심각한 국가폭력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으신 생존 피해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경기도지사로서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책임 있는 자세로 피해자분들의 상처 치유와 명예 회복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진실규명이 이뤄진 뒤 경기도 차원의 첫 공식 사과다.
선감학원은 지난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군인 양성을 위해 설립한 시설로, 해방 이후 1946년부터는 경기도가 인수해 1982년 폐쇄되기까지 부랑아 수용소로 쓰였다.
당시 국가는 부랑인 문제 해소와 도시환경 정화 등을 명분으로 신고단속체계를 구축해 아동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적극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1956년 법무부, 내무부, 보건사회부 합동으로 발표한 '부랑아 근절책 확립의 건'에는 '부랑아 조기발견, 수용보호, 본적지 송환, 부랑행위 방지'가 목적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와 주거지가 있고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복장이 남루하거나 주소를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끌려가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