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이었다" 허위이력으로 선감학원 채운 '국가'[영상]

허위이력으로 '부랑아' 된 아동들
공권력의 강제연행 명분 갖추기
원생 절반 이상 부당하게 입소
참혹한 학대·폭력…후유증 극심
퇴소 뒤에도 삶은 '악순환의 늪'
"진실규명 후 공권력이 책임져야"

정효일씨의 선감학원 아동대장에는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행방불명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당시 부친은 군장교로 재직중이었고, 모친도 전업주부로 가정을 돌보고 있었다. 정씨 제공

"너무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죠.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두 분 다 없다고 써놨으니…"
 
정효일(65)씨는 60년 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인천 송도유원지 인근 집 앞이었다. 검은 옷차림을 한 남성들이 한창 뛰어놀던 그를 막아섰다. 배를 타고 끌려간 곳은 낯선 섬, 선감도다.
 
그곳에서 당한 참혹한 학대보다도, 왜 끌려갔는지 알 수 없어 더 억울하고 비참했다. 불과 다섯 살이었다. 비슷한 시기 선감학원에 있던 원생들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런 정씨가 몇 년 전 자신에 대한 원아대장을 받아보고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문서에는 '부친 사망, 모친은 행방불명'이라는 글귀가 또렷이 적혀있었다. 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살림을 도맡던 어머니 곁에서 생활하던 그가 거처 없이 떠도는 '부랑아'로 둔갑돼 있던 것.
 
"경찰들한테 끌려갔는데, (선감학원) 안에서는 도청 직원들이 관리를 했죠. 처음 들어가니까 완장 찬 형들(다른 원생들)이 '너도 공무원들 실적 채우려고 들어온 거냐'고 놀리더라고요."
 
입소 얼마 후 시설 안에서 자신의 두 형을 차례로 만나고도 반길 수조차 없었다. 그가 실종되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면서 동생을 찾아 나선 형들마저 끌려온 건데, 이른바 '큰형'으로 불리던 동료 원생들의 감시와 구타로 서로 알은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삼형제의 동반 입소는 이들을 엮어 강제 연행할 구실이 되기도 했다. 원아대장에는 '정○○과 같이 인천 중심으로 걸식을 해왔음. 형 정○○은 합심사에 수용'이라고 기록돼 있다.
 
3~4년 모진 학대를 겪고서는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분리이송을 거쳐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나 자신을 잃어갔던 겁니다."
 
지난 1970년대 선감학원 원생들의 모습. 선감역사박물관 제공

실종된 지 8년쯤 지나서야 부모의 수소문으로 집에 돌아온 정씨는 원아대장의 '호일' 아닌 '효일'이 본명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됐다.
 
국가에게 빼앗긴 시간은 가족 모두의 트라우마가 됐다. 자식들을 되찾은 뒤에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온 부모는 환갑을 넘기자마자 나란히 세상을 등졌다. 학력이 없어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정씨는 구두닦이와 차량정비사를 전전하며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왔다.
 
정씨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선감도의 악몽 때문에 살면서 섬으로는 여행도 가지 않는다"며 "한 인생이, 우리 가정이 국가로 인해 처참히 짓밟혔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해맑던 아이들을 '부랑아로 둔갑'시킨 그림자

김윤선씨에 대한 선감학원 원아대장에도 사실과는 다르게 가정불화와 부모의 가출, 걸식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김씨 제공

반백년 넘는 세월을 흘려보낸 김윤선(65)씨 역시 열한 살 무렵 봄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처럼 동인천 집 근처 외할머니댁에 놀러가던 길. 과일가게가 즐비한 대로변이었다.
 
백주대낮 김씨는 곤봉을 쥔 건장한 남성 두 명에게 붙들려 트럭 짐칸에 던져졌다. 서른 명쯤 되는 함께 탄 또래 아이들이 군홧발에 치여 피를 흘리는 모습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는 "60년대였으니 형편이 다들 어려워서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녔는데, 그러다가 재수가 없으면 불량배나 비렁뱅이로 몰려 잡혀 들어갔던 것 같다"고 덤덤하게 돌이켰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살던 더없이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의 원아대장 입소경위에는 '가정불화로 부모는 각각 헤어져 살고 있으며, 본인도 모르게 집을 나가 부모 이별로 걸식 생활로 전전하다 수집반에 의해 입소됨'이라고 기재돼 있다.
 
김씨는 "거짓이다. 퇴소기간을 줄이고 학년 맞춘다고 나이까지 낮췄다"며 "집이 있다고 따져도 돌아오는 건 매질뿐이었고, 교육은커녕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지옥이었다"고 분노했다.
 
과거 선감학원 근처에 위치했던 염전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5년 넘게 가혹한 노동을 마치고 퇴소한 후에는 또 다른 '감옥'이 그를 기다렸다. 영문도 모른 채 아줌마를 따라 간 곳은 김씨 집이 아닌 '주인집'이었다. 열일곱 나이에 화성지역 농가에 머슴으로 팔려간 것이다. 성인이 돼 독립하고도 정씨처럼 취업이 안 돼 불운한 삶은 계속됐다.
 
서른 살쯤 자신이 살던 동네를 헤매다 우연히 친척집을 찾아 가족들과 재회했지만, 실종신고와 군입대 지연으로 주민등록은 말소된 상태였다. 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씨는 "친척들은 내 얼굴이 완전 변해서 처음엔 내가 아니라고 의심했다"며 "심지어 조카가 아닌 간첩으로까지 몰려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조작된 입소 과정…절반은 가족 있어도 '강제 지옥행'

지난 1942년 선감도에 처음으로 도착한 원생들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끔찍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아동집단수용소였던 선감학원 내 원생들이 국가기관의 이력 조작에 의해 마구잡이로 끌려간 것으로 드러나 피해자들의 원성과 사회적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1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과거 정부가 아동집단수용소였던 선감학원에 부랑, 걸식을 이유로 아이들을 무분별하게 입소시킨 정황이 문서와 증언을 통해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그간 동인천역과 수원역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원생들이 강압적으로 부당하게 입소됐을 가능성이 제기돼 왔는데, 이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로써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선감학원은 지난 1942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군인 양성을 위해 설립한 시설로, 해방 이후 1946년부터는 경기도가 인수해 1982년 폐쇄되기까지 부랑아 수용소로 쓰였다.
 
당시 국가는 부랑인 문제 해소와 도시환경 정화 등을 명분으로 신고단속체계를 구축해 아동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적극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1956년 법무부, 내무부, 보건사회부 합동으로 발표한 '부랑아 근절책 확립의 건'에는 '부랑아 조기발견, 수용보호, 본적지 송환, 부랑행위 방지'가 목적으로 명시돼 있다.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 매장 추정지 일대 모습. 황진환 기자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실제로는 부모와 주거지가 있고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복장이 남루하거나 주소를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공권력은 부당한 연행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정씨와 김씨 사례처럼 이력까지 허위로 조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실태는 관련 통계에도 여실히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 보고서(2018)'에 따르면, 피해 생존자 2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50%가량은 입소 전 가족 등과 정상적으로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됐다.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가 진실화해위원회에 피해사실을 신고한 200여 명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체 조사에서도 70% 이상은 부모 등이 있는데도 강제 연행된 것으로 추산됐다.
 
누적 4700명에 달하는 원생의 41%는 8~13세의 어린 나이였고, 75%는 경찰과 공무원에게 연행됐다는 인권위 조사결과도 있다. 또 절반은 퇴소 후 구걸과 부랑의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관리자 만행+동료 간 학대…'아비규환'의 후유증

'소년판 삼청교육대'로 불려온 선감학원의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유해 시굴이 시작된 지난달 26일 경기도 안산 단원구 선감동 희생자 유해매장 추정지에서 한 피해 생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황진환 기자

이처럼 강제로 끌려간 선감학원에서의 생활은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최연소의 작은 체구였던 정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 조회를 마치고 해질녘까지 누에를 기르고 뽕잎 따는 양잠 노역이 주된 일과였다. 계도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다.
 
숙소에서는 갖은 학대가 벌어졌다. 겁에 질려 "집에 보내달라"고 울부짖던 그를 선생으로 불리던 공무원들이 돌바닥에 내동댕이칠 때면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잠겼다. 곡괭이에 맞아 머리가 파이는가 하면,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우물에서 물고문 당하기도 다반사였다.
 
잠자는 것도 곤욕이었다. 한 방에 서른 명 안팎 몰려 옆으로 눕는 '칼잠'을 잘 정도로 비좁았다. 그 자세로 큰형들이 원생들에게 했던 짓이 성폭행이었다는 것은 한참이 지난 뒤 알았다.
 
고깃국과 흰쌀밥에 익숙했다는 그가 식당에서 배식 받은 것은 꽁보리밥과 검게 삭은 젓갈뿐.
 
정씨는 "젓갈은 구역질이 나 근처 염전에서 몰래 가져온 소금을 비벼먹었는데 꿀맛 같았다"며 "허기를 참다못해 누에를 구워먹거나 젖은 흙을 입에 넣기도 했다"고 아린 기억을 더듬었다.
 
소, 돼지, 닭 등 축사 배설물을 치우고 먹이를 주던 김씨도 열악한 환경에서의 노동과 구타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였다. 소여물을 작두로 썰다 친구 손가락이 잘려나갔는데, 지혈을 받지 못해 담배로 상처를 눌러 막았던 끔찍한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가족이 있다고 항변을 할 때면 공무원들은 되레 더 거칠게 각목을 휘두르며 그를 제압했다.
 
이들 외에도 경기 북부의 한 보육원 출신 60대 피해자 A씨는 아홉 살에 잡혀가 수년간 염전 노역만 하다 선감학원이 폐쇄되면서 경기도청으로 보내졌다. 이후 다시 보육원을 옮겨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부산 형제복지원으로까지 밀려난 사례다.
 
보육원 출신 피해자인 B씨도 수원에서 구두닦이를 하다 끌려가 오전 한 때 근처 국민학교에서 수업 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축산부터 양잠, 농사 등 온갖 노역에 투입됐다. 견디다 못해 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다 세 번 만에 성공했지만, 한 달 뒤 다시 잡혀 원아대장이 두 장이 됐다.
 
B씨는 "대부분 도망치려던 친구들은 물살에 휩쓸려 죽은 채 다시 떠내려 왔다"며 "우리 손으로 여러 군데 나눠 묻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인권위의 선감학원 실태 보고서에는 원생들이 염전, 농사, 축산, 양잠, 석화 양식 등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것은 물론, 급식 양이 부족해 열매, 들풀, 곤충, 뱀, 쥐 등을 잡아먹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시설 내 학대로 심각한 신체·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진실규명 결정 임박 "결자해지는 공권력의 몫"

시굴 과정에서 발견된 치아와 단추 등.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이 같은 연행절차의 부당성과 피해 사실은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조사에서도 밝혀질 예정이다. 이를 토대로 오는 20일 진실규명 결정 여부에 대한 발표가 예고돼 있다.
 
진실규명 사건으로 결정되면 선감학원 생존자들은 처음으로 피해자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동안 법적 지위가 없어 받지 못했던 국가로부터의 피해 배·보상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이에 더해 피해자로서의 법적 지위가 주어짐으로써 별도 개별소송 절차 없이 피해회복에 대한 지원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법 제정도 더욱 힘을 받게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도에서 3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의료비와 추모제, 피해사례 신고센터 운영 지원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국가의 잔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공식화하고, 진정어린 사과와 반성으로 생존자들과 고인이 된 희생자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길 바라는 기대가 크다.
 
피해 생존자인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진실을 밝혀 피해 배상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역사적 과오를 분명하게 진단하고 진정성 있는 피해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게 국가 기관, 특히 경기도의 역할이자 의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의 말처럼 현재 시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유해 발굴을 전면 확대해 피해 규모를 정확히 하고, 추모사업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관계 당국의 적극적 역할이 시급한 실정이다.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는 "보다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집계하려면 유해 발굴을 본격화해야 된다"며 "여러 조사 내용을 취합해 진실규명을 하는 것은 우리 위원회 역할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경기도나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경기도 관계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내용이 나오면 이를 토대로 관할 지자체 차원에서 최대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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