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 출구는 성평등인데…복지부 아래 여가부?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가 발표된 가운데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여성가족부 복도의 모습. 류영주 기자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여성가족부(여가부) 폐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여가부의 기존 업무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해 이관하겠다는 계획이다.
 
고용노동부로 옮겨지는 여성고용 정책을 빼면, 사실상 여가부의 모든 기능이 복지부로 흡수되는 것이다. 정부는 이같은 통·폐합을 통해 '양성 평등'과 여성·가족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국민의힘은 지난 7일 여가부 폐지와 국가보훈부 격상, 재외동포청 신설을 뼈대로 한 정부조직 개편안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관련 브리핑에 직접 나선 지 하루 만이다. 국회에서의 신속 처리를 위해 여당이 총대를 멘 모양새다.
 
소속 의원 115명 전원이 발의자로 오른 것은 여가부 폐지를 '당론'으로 확실히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가부 폐지기능 이관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한 권은희·김미애 의원 외엔 특별한 반론도 없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법안 통과를 위해 동의를 얻어야 할 야당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7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조직 개편안을 두고 '우선순위가 잘못됐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미래지향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고 언급했다고도 전해진다.
 
젠더 이슈에 보수적인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속셈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생 문제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인구 위기'를 돌파할 복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비단 야권만의 우려는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0.75명'이다. 상반기 태어난 아이는 12만 8천여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사망자가 출생아를 앞서는 '데드 크로스'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당정이 제시한 일종의 인구위기 대책이 여가부 폐지라는 대목에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현재의 여가부 형태로는 젠더 갈등과 인구 감소 등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정부의 인식이 단적인 예다. 구조적인 '성(性) 불평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전담할 부처도 필요치 않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등의 내용이 담긴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기 전 인사하고 있다. 정부안에 따르면 여성가족부는 없어지고 주요 기능은 보건복지부로 이관돼 복지부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가 신설된다. 여가부가 실제로 폐지되면 2001년 여성부 출범 이후 21년 만이다. 또 외교부 장관 소속으로 재외동포청을 신설하는 한편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격상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박종민 기자

이상민 장관은 지난 6일 "여성 불평등 개선에 집중했던 여성정책의 패러다임을 남녀 모두를 위한 양성평등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라며 "개별 구체적인 불공정 이슈는 이제 성별이 아닌 사회적 약자 보호 측면에서 대응해야 하며, 보다 종합적인 사회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공정 이슈'는 성별 차원으로 접근할 시기가 지났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하지만 '성평등'은 갈수록 심화되는 저출생 문제를 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꼽히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청년층이 미래를 꿈꾸기 어려운 '돈 문제'도 있지만, 보다 뿌리 깊게 작동해온 고질적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국제 경제 전문가인 제이컵 펑크 키르케고르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저먼마셜펀드 선임연구원은 "한국 저출생 위기의 근본원인은 성차별적 사회구조"라며 "한국이 성평등을 이루기 전까지 출산율 반등은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력 단절'과 '독박 육아'가 산모를 기다리는 현실을 볼 때 "한국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나쁜 거래"라고까지 했다.

국내 전문가들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 역사가 유구한 한국에서 여가부는 성평등 정책을 추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여가부 출범 20주년을 맞아 전문가 3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델파이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전문가는 성별영향평가, 성인지예산 등 성 주류화를 위한 정책 도구의 제도화를 여가부의 주요성과로 꼽았다. 성평등을 위한 국가 차원의 법·제도 정비와 함께 여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권익 증진도 공통적으로 거론됐다.

독립부처로서 국무회의 의결권을 보유하게 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01년 여가부가 생기기 전까지 여성특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로 지적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여러 번 존폐 위기가 불거졌던 만큼 아쉬움이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다만 이조차도 여가부의 핵심기능이나 존재 이유를 부정하기보다는, 되레 여가부의 권한이 '제한적'이며 '성차별 시정기능이 부재하다'는 데 방점이 찍혔다. 권한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조직 규모와 예산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다.
 
생애주기에 따른 여성정책을 관장했던 여가부가 분해되면서 '정책 사각지대'가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코로나19 사태 여파로도 드러난 고용 불평등, '신당역 스토킹 살인' 같은 여성폭력 등도 지엽적 측면에서 산발적으로 다뤄질 우려가 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는 장관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에 관한 여성계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여가부의 마지막 수장으로 남게 된 김현숙 장관은 "가족을 중심으로 여성·아동·청소년·노인을 다 모아서 생애주기별 정책을 추진하는 (복지부)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는 인구문제 해결에 첩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일각에서는 '부처로도 풀지 못한 국가 과제를 (부처 산하) 일개 본부로 어떻게 풀겠다는 것이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여가부 장관을 지낸 정현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가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 독일의 연방 여가부는 우리 여가부 예산의 10배이고, 직원도 900명"이라고 말했다.

이어 "복지부 산하에 3차관이 (따로) 없다 하면 차관 아래는 실장이다. 실장이 움직여서는 인구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며 "이렇게 현실성 없는 방안으로 성평등 문제, 저출생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니 여성들이 신뢰할 수 있겠나. 본부를 만들어 해결하겠다는 발상이 기가 막힌다"고 지적했다.

성평등의 핵심인 '일자리', '돌봄' 문제 또한 여가부 쪼개기로는 어렵다고 봤다. 정 교수는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불만은 일자리 문제고 임금 격차인데, 노동부와 복지부에서는 해결이 안 된다"고 했다. 

또 맞벌이·한부모 가정을 지원하는 여가부의 '아이돌보미' 사업을 들어 "돌봄공백을 메꾸려면 아주 미세하게 들어가야 한다. 어떤 여성기자는 이 제도가 없었다면 직업생활을 할 수 없었을 거라 하더라"고 말했다.


여성계도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115개 단체는 지난 7일 성명을 내고 "여가부가 해오던 모든 기능은 조직 축소, 기능 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 자명함에도 '여가부의 격이 높아진 것'이라는 정부의 이야기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정부조직법 개편안은 20여 년 전 '부녀복지 시대'로의 회귀이자 여성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던 과거로의 퇴행"이라며 투쟁의지를 밝혔다.

김 장관은 전날 협조 요청차 여성단체와 긴급 간담회를 열었지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불참했다.

'졸속 추진' 의혹도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실에 따르면, 여가부는 조직개편 주무부처인 행안부와 협의내역을 묻는 질의에 "유선 통화, 면담 등으로 수시 협의했다. 공식 면담이 아니라 기록이 없다"고 답변한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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