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관련해 정부 간 지속적 협의를 약속한 친서를 보냄에 따라 작게나마 개선의 여지가 생겨났다.
미국 의회가 입법을 주도했고 이미 시행된 상황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지만 지금으로선 그 외의 현실적인 방안이 거의 없다.
이로써 '외교참사' 논란에 휩싸인 정부로선 최악은 면했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외교는 보이지 않는 물밑거래가 훨씬 많다. 곤경에 처한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친서 한 통으로 인해 어떻게든 빚을 졌다.
따라서 IRA 대응에 실패해 전기차 분야의 국익을 지키지 못한 정부 책임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살벌한 경제안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철저한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다.
대통령은 휴가 장관은 출장…펠로시 통화 전 IRA보고서 받고도 내용 깜깜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내막이 드러나고 있는 정부의 난맥상은 미흡한 초기 대응으로 인해 사안의 중대성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게 핵심이다.주미 대사관이 7월 29일 IRA 관련 1차보고를 하고 8월 4일에는 2차 심층보고를 했지만 박진 외교부 장관은 출장 중인 8월 10일에야 이를 처음 알게 됐다. 때문에 8월 5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선 IRA가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
대통령실도 8월 4일 오전 일찍 2차 보고서를 받았지만 이날 오후 윤 대통령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통화에선 역시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 휴가 중인 윤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은 휴가 중이고 주무 장관은 출장 중이었지만 정상적인 국정체계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외교 소식통은 "외교장관은 출장 중에도 현지 공관을 통해 본부 보고를 계속 받는데 이를 누락한 것은 업무 태만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전기차' 문제 빠져있어 몰랐다?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버젓이 게재
정부는 미국 행정부도 아닌 의회가 비공개리에 전광석화처럼 법안을 처리하는 바람에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항변한다. 일종의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다.실제로 유럽연합과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 상황 전개임은 분명하다.
외교부는 언론 배포 자료에서 "펠로시 의장 방한 및 ARF 계기 외교장관회담 당시에는 우리 정부로서도 (IRA) 법안 관련 동향 파악 및 내용 분석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미측에 우려를 제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고 밝혔다.
야당의 주장처럼 윤 대통령과 펠로시 의장 간 통화 전 6시간, 한미 외교장관회담 전까지는 6일간의 '골든타임'이 있긴 했지만 현실적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무 사안이나 다 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보고 전에) 충분히 검토도 해봐야 하는데, 그 시점에선 그렇게 심각한 사안인지 솔직히 알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결과를 놓고 (당시 상황에) 맞춰갖고 얘기를 하니까 조금 서운한 감도 있다"며 사후적으로 상황을 재단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당국자 "사후적으로 상황 재단 말아달라" 야당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찾았는데"
하지만 상황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감자료를 통해 바이든 대통령의 IRA 관련 발표(remark), 미 상원 예산조정안 원문, 미 공화당 상원 홈페이지 등 6개 사례를 제시하며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찾는 IRA 보조금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백악관이 7월 28일 게시한 바이든 대통령의 발표에는 "미국 내 제조된 전기차의 경우 보조금 7500달러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명시돼있다.
8월 4일 주미대사관의 2차보고 전까지는 IRA 내용 중에 전기차 문제가 빠져있어 사안의 중요성을 파악하기 힘들었다는 정부 해명과 완전 배치된다.
외교부는 "펠로시 의장의 보도자료(7월 27일)에는 IRA 법안 중 우리 기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전기차 세액공제에 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송 의원실 관계자는 "설령 (펠로시 의장의 보도자료를 포함해) 다른 것은 바빠서 못 보고 몰라서 지나쳤다 치더라도 바이든 대통령 발언 정도는 당연히 체크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경제안보센터는 5월 출범 직후 센터장 공석…불가피했다지만 하필 이 와중에
이처럼 IRA 논란이 커지면서 외교부 소속 경제안보외교센터로도 불똥이 튀고 있다.
지난해 요소수 사태를 계기로 지난 5월 출범한 조직이지만 센터장이 그 직후부터 최근까지 공석 상태인 것이다. 외교부는 김상희 민주당 의원이 이 문제를 지적한 지난 4일 후임자를 인사 발령했다.
외교부는 센터장을 겸한 양자경제외교국 김모 심의관이 대통령실로 파견된 이후 대행체제로 운영해왔기 때문에 업무 공백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 고위공무원단 인사가 적체된 검증 수요 등으로 전반적으로 늦어지면서 외교부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필이면 경제안보 핵심 역할을 맡은 조직이, 그것도 설립되자마자 센터장이 바뀌고 4개월 넘게 공석이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