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부산의 한 빌라에서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사건 초기 극단적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초동수사를 부실하게 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이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각종 사실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정황도 이어져, 경찰의 사건 대응이 총체적으로 부실했다는 비판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유족 "경찰이 처음부터 극단적 선택 가능성 언급"…경찰 섣부른 판단 정황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2일 낮 12시 50분, 부산진구의 한 빌라에서 40대 여성 A씨와 10대 딸 B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A씨는 거실에서 있었고, B양은 자신의 방에서 발견됐다. 최초 발견자는 다른 방에 있던 아들 10대 C군이었다.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극단적 선택과 타살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인 침입 흔적이 없다는 점과 최초 검안 소견을 바탕으로 극단적 선택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숨진 모녀의 유족 측은 "경찰은 첫 조사에서 숨진 A의 몸에서 주저흔이 발견됐고, 외부인 침입 흔적이 없다며 극단적 선택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했다"며 "당시에는 경찰이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고 말했다.
'주저흔'이란 극단적 선택을 할 때 한 번에 치명상을 가하지 못해 생기는 상처를 말한다. 하지만 일선에서는 주저흔이 발견됐다 하더라도, 극단적 선택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산의 한 일선 형사는 "주저흔은 극단적 선택에 실패했을 때도 생기지만, 초범이나 흉기 사용이 서툰 사람이 상대에게 겁을 주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처가 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각종 타살 정황 포착 못했다가 유족 진술 이후 뒤늦게 수사 방향 재설정
유족들이 본격적으로 타살을 의심한 건 사건 발생 사흘째인 14일이었다. 유족은 A씨 입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귀금속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한 뒤 이를 경찰에 알렸다.
한 유족은 "장례 절차에서 A의 귀금속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됐고, 경찰에 귀금속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며 "경찰은 발견 당시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귀금속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밖에 또 다른 타살 의심 정황인 '덮인 이불'도 경찰이 아닌 유족이 먼저 인지했다. 유족에 따르면 최초 발견자인 C군이 숨진 모녀를 발견했을 때, 모친 A씨는 거실에서 이불을 덮은 채 숨져 있었다.
유족은 당시 C군이 옆집에 도움을 요청한 뒤 이웃과 함께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이불을 걷어냈다고 설명했다. 또 경찰 조사에서 이런 진술을 했다고 전했다.
유족 관계자는 "유족들이 어떻게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있냐고 경찰에 물어보니, '우리가 처음 발견했을 땐 이불이 걷어져 있었다'고 답했다"며 "최초 발견자인 C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찰이 타살 정황을 간과한 결과, 숨진 B양의 휴대전화는 사건 발생 5일이 지나서야 빌라 건물 밖에서 버려진 채 발견됐다. 또 사라진 A씨의 귀금속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건 초기 모녀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유족은 가족을 잃은 아픔에 더해 세간의 좋지 않은 시선까지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한 유족은 "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 유족은 큰 충격을 받았고, 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유족이 지인들로부터 '안 좋은 상이라 빈소를 찾아가지 못한다'는 말까지 들었다"며 "지금은 어서 범인이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극단적 선택과 타살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했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부산진경찰서 관계자는 "형사는 유족에게 극단적 선택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다. 검안의 소견도 의견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할 뿐"이라며 "모든 가능성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바로 부검을 했고, 수사를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진 금품 인지 시점·발견 당시 상황 등 유족 주장과 엇갈려…경찰 '거짓 해명' 논란도
한편 경찰이 초동 수사 부실 지적을 피하기 위해 거짓 해명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부산경찰청은 숨진 A씨의 금품이 사라진 사실과 관련해 사건 다음 날 곧바로 인지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사건 첫날 경황이 없는 유족들이 제대로 진술을 하지 못해, 금품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지만, 다음 날 바로 인지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유족 등 관계자의 말을 종합한 결과 경찰은 장례절차가 시작된 14일 유족으로부터 금품이 사라진 사실을 전달받은 뒤, 뒤늦게 확인 작업에 나섰다.
숨진 여성의 금품이 사라진 사실 역시 타살 등 범죄 피해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로 여겨지는 만큼, 경찰이 초동 수사 부실 지적을 피하기 위해 인지 시점을 앞당겨 설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또 유족 등에 따르면 숨진 A씨는 처음 발견 당시 이불을 덮은 채 숨져 있었지만, 경찰은 출동 이후 목격한 첫 현장을 근거로 여성이 이불 등을 덮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또 C군 등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런 진술을 남겼지만, 줄곧 "관련 진술은 없었다"는 입장을 반복한 바 있다.
흉기를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사건 초기에 이 사실을 확인했다면 극단적 선택 가능성을 배제하고 타살 정황을 확보하는 단서나 진술이 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유족 측 주장이 사실이라며 초기 설명이 잘못됐다고 인정했다. 다만 상급 기관에 보고 과정에서 일부 사실이 전달되지 않은 것 뿐이라며, 거짓 해명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부산진서 관계자는 "귀금속이 사라진 사실은 14일에 확인한 게 맞다. (변사자가) 이불에 덮인 것도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게 사실"이라며 "지방청은 직접 수사를 하지 않고 보고만 받기 때문에 상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경찰청 관계자 역시 "보고받은 내용에 따라 현재 상황을 말했고, 수사 과정에서 진술이 나온 사실을 몰랐던 것 뿐"이라며 거짓 해명은 전혀 아니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