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처장의 SFO 방문을 위한 영국 출장은 최근 한 두 달 준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검찰의 기소 독점주의를 깨고 탄생한 공수처의 수장으로서 "영국 제도가 현재 우리나라에게 가장 유의미하다"고 한 김 처장이기에 영국 출장은 '숙원사업'이라고까지 느껴진다. 영국은 1980년대 CPS를 세워 경찰에서 기소권을 분리했고, 같은 시기 경제·부패범죄를 담당하는 SFO를 설립했다. SFO는 공수처 설립 당시 모델로 삼은 기구 중 하나다. 공수처 내부에서는 "언젠가는 갔어야 했고, 오히려 조금 늦은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기관의 장이 해외 출장 가서 업무 협약을 체결하는 일이야 유별날 게 없는 일이다.
문제는 '지금 공수처의 현실' 때문에 발생한다. 공수처장이 영국 출장을 그토록 오래 준비하는 동안 공수처 내부는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나가고 있는 지경이어서다. 그 터져 나간 상처는 검사들과 수사관들의 '사표'로 표출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4개월 간 무려 5명의 검사가 사의를 표명했다. 김 처장이 검사·수사관 완전체 1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6일 간담회를 연 지 얼마 안 돼 6월 초 첫 사표가 나왔다. 감사원 출신의 문형석 검사다. 7월에는 경찰 출신의 김승현 검사가 사표를 냈다. 8월 초에는 두 명 있는 부장검사 가운데 한 명인 최석규 부장검사가 사표를 냈다. 같은 소속 부서 검사와 병가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빚은 게 원인으로 지목됐다. 공수처는 최 부장검사 사표를 만류하고 겸임하고 있던 수사3부장 직위만 해제했다. 8월 중순 공수처장은 새 CI와 슬로건을 발표하며 새 출발을 공언했다.
공수처장이 첫 해외 출장을 간다는 내용의 정례 브리핑이 있던 지난 20일, 이승규 검사와 김일로 검사가 사의를 표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공수처는 이승규 검사를 만류하고 있고 김일로 검사 사표를 반려했다는 답변을 내놨다. 앞서 사의를 표한 최 부장검사의 사표는 결국 처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수사관들은 지난달까지 6명이 사직했고 최근 일부 수사관들이 사의를 표시했다고 알려졌다. 김 처장이 수 차례 새 출발을 다짐하고 출장을 준비하는 동안 검사들과 수사관들은 계속해서 사표를 준비한 셈이다. 사표를 하루 이틀 만에 결정하는 사람은 없다.
구멍 뚫린 공수처법의 토대 위에 연 이은 수사 실패로 인한 자신감 하락, 지도부의 판단력 부족 등이 검사들이 사표를 결심하게 된 대표적 원인들로 꼽힌다. 특히 지난해 공수처가 온 힘을 쏟아 부은 고발사주 의혹 수사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내부 구성원에게 큰 타격을 줬다는 평가다. 실제 고발사주 수사 개시 여부를 두고 논의가 있었던 당시 수사를 해도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지만 지휘부가 강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말 구속영장, 체포영장, 다시 구속영장까지 기각됐는데도 일부 기소를 하면서 검찰을 개혁하려고 만든 공수처가 과거 검찰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외부 핀잔마저 나왔다. 공수처의 한 관계자는 "지휘부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내부 구성원들의 말을 경청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해 피격 공무원의 유족은 문재인 정권의 고위직들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을 공수처에 이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얘기를 들은 공수처 검사들은 큰 상처가 됐다고 한다. 수사기관은 '신뢰'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강제 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너도나도 "이 수사를 못 믿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수사기관은 수사기관일 수 없다. 지금 공수처에 필요한 건 제도 정비보다도 신뢰 회복이다. 수사기관으로서 신뢰가 회복 된 후에야 이를 발판 삼아 제도도 정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