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핵 독트린 연설은 북한 내부용?

최고인민회의에서 연설하는 북한 김정은. 연합뉴스

"국가방위력 건설을 최우선, 최중대시하여 절대적 힘을 무한대로 끌어올리고 공화국 무장력을 더더욱 불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공화국 정부 앞에 나선 제1혁명 과업입니다"
 
"식량 문제, 인민소비품 문제를 비롯한 인민생활 향상과 관련한 절실한 문제들을 원만히 푸는 것은 공화국 정부 앞에 나선 가장 중요한 혁명 과업입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행한 핵 독트린 시정연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물론 미국을 향한 핵 억제에 있다. 기존의 핵보유국 인정 요구를 넘어 핵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공세적인 핵 교리를 천명함으로써 한미동맹을 향한 강력한 억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핵보유국의 지위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선언하고 핵사용 교리를 법제화함으로써 윤석열 정부의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을 초기부터 무력화하는 의도도 엿보인다.
 

대미 핵 메시지와 함께 대내문제 크게 고려한 김정은 연설 

북한 정권수립 74주년(9ㆍ9절)을 맞이해 지난 8일 평양 만수대기슭에서 경축행사가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그런데 동시에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이런 대외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와 민생 등 대내적인 측면도 상당히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50분의 연설 중 21분이 핵 무력 정책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가 경제와 민생 등 국내 현안에 대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말 한대로 핵 무장력 고도화가 "공화국 정부 앞에 나선 제1혁명 과업"이지만, 식량과 인민소비품 생산 등 인민생활 향상 문제도 "공화국 정부 앞에 나선 가장 중요한 혁명 과업"이다.
 
김 위원장이 이번에 핵사용 교리를 상세하게 밝힌 것 자체가 대북제재와 코로나19의 장기화속에 지친 인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경제 5개년 계획을 원활하게 추진하려는 국내정치 이벤트라는 분석도 나온다.
 

北 인민들 지지하는 핵카드 다시 꺼내들어 통치정당성 강화

북한, 열병식에 등장한 '화성-17형'. 연합뉴스

북한 인민들에게 핵은 애국심을 느끼게 하는 '자랑스러운 것'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북한이탈주민 124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뒤 지난 4월 공개한 '김정은 집권 10년 북한주민 통일의식' 보고서에 따르면 핵 보유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지지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온다.
 
'북한에 살 때 주변 동료들이 핵무기 보유에 찬성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찬성'이 50.2%, '반대'가 22.6%, '반반'이 27.3% 등이었고, 특히 찬성의견은 2014년 46.3%에서 2018년 56.3%까지 상승한 뒤 하락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핵 보유 찬성 의견이 2018년에 최고치에 이르렀다는 것은 한 해전인 2017년 11월 말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 15형의 발사 성공과 핵 무력 완성 선언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높은 지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김 위원장은 대북 제제의 장기화에 따른 내핍 경제 속에서 핵 정책의 법제화라는 형식으로 북한 인민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핵 카드를 다시 꺼내든 셈이다.
 

핵 법령 채택을 5개년 경제계획 수행 독려에 활용

김 위원장은 이번 시정연설에서 핵 정책 법령 채택을 "당과 국가의 주요 정책들을 실현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법적 무기"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핵 능력을 "사회주의의 줄기찬 발전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가져야 할 "절대적 힘"이라고 규정했다.
 
김 위원장이 완성한 핵 무력이 북한 경제와 인민생활 안정 등 주요 정책 실현을 위한 중요한 토대라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은 더 나아가 "우리식 사회주의의 전면적 발전을 위한 역사적 진군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법적 무기를 마련해놓은 것은 올해에 이룩된 자랑찬 승리와 성과들과 더불어 전 인민적인 투쟁기세를 비상히 앙양시키는데서 획기적인 계기"라고 말했다.
 
핵 법령 채택을 5개년 경제계획 수행 등 국내문제 해결을 독려하는데 적극 동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김 위원장이 5개년 계획 중에서도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급선무"로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역시 "먹는 문제, 소비품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김 위원장은 "농업생산과 경공업 발전에 계속 주되는 힘을 넣어야한다"며, "인민들의 피부에 직접 가닿는 실질적인 결과물이 현실로 나타나야" 하고, "인민생활에서 기초적인 문제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하여 인민들이 계속 고생하게 만든다면 그런 경제사업은 아무리 해도 필요"없고 강조했다.
 

연설의 결론은 인민정권기관 간부들 다그치기

연합뉴스

연설의 결론은 사실상 '인민정권기관의 일꾼들', 즉 간부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위원장은 모든 간부들은 "잠시도 헛눈을 팔지 말고 항상 중압감 속에서, 긴장된 책임의식 속에서 자기 임무에 무한히 성실"하여야하고, "새로운 일감이 제기되면 회피하거나 적당히 굼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솔선 온 몸을 내대고 치밀하게 작전지휘하며 이신작칙의 기풍으로 투신"하며, "혁명 밖에 모르고 맡은 본분을 손색없이 해나갈 줄 아는 진짜 필요한 일군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소비재를 제외한 모든 물자와 자금의 이동 및 거래를 막아 사실상의 금수조치에 해당되는 대북제재가 2018년 이후 5년째 지속되고 있고 코로나19까지 겹친 절박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인민들의 지지와 통치 정당성을 확인하고 간부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내세운 카드가 결국 핵 법령 채택으로 풀이된다.
 

김정은 연설 곳곳에서 드러난 식량 등 민생 위기의식

김 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애써 자신감을 피력했다.
 
"나라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하여 현행 생산에만 급급 하는 것은 보신이고 후퇴이며 혁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면서 실현 가능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원대한 국가비전으로 "동 서해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 등 대규모 건설 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우리의 투쟁은 유례없는 국난을 동반"하고 있고, "우리 앞에 조성된 경제적 난관은 엄혹하다"며 여러 차례 절박함과 위기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핵 법령 채택으로 핵사용의 5대조건 등 새로운 핵 독트린을 밝히며 대미 억제에 나섰으나 김정은 연설의 핵심은 경제와 민생 우선"이라며, "북한 지도부는 90년대 고난의 행군에 이어 이번에도 먹는 문제 해결 등 인민생활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핵을 갖고 있다고 해도 더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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