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들어가는 유럽…기후재난, 잘사는 나라도 피할 수 없다

▶ 글 싣는 순서
①홍수에 초토화된 파키스탄…빈국에 더 가혹한 기후재난
②타들어가는 유럽…기후재난, 잘사는 나라도 피할 수 없다

(계속)
지난달 16일 스페인 서부 바다호스 지역의 과디아나강이 폭염과 가뭄으로 말라있다. 연합뉴스

"앞으로는 현 수준의 폭염이 '정상'이 되고, 훨씬 강렬한 극단이 나타날 것이다."(페테리 탈라스 세계기상기구 사무총장)

올여름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빈국이 수마에 시달리는 동안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은 불볕더위에 타들어갔다. 부국이라도 기후위기에 안전할 수 없다는 게 이번 유럽의 대규모 가뭄으로 확인됐다.

9일 유럽연합 당국과 외신 등에 따르면 유럽 일대에 40도 안팎의 폭염과 가뭄이 닥쳐 직간접적 영향으로 수천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이번 가뭄은 8월 한때 유럽 대륙의 64%가 가뭄에 휩싸이는 등 최소 500년만에 최악으로 평가됐다.

지난달 16일(현지시간) 프랑스 서부 루아로상스 인근을 흐르는 루아르강의 지류가 오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곳에 따라 내린 비로 일부는 복구되기도 했지만, 고온건조한 날씨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것이라는 예보에 따라 가뭄 피해도 상당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미 5월부터 강수량 부족에 시달리던 유럽은 여름철 본격적으로 폭염이 시작되면서 최악의 가뭄을 맞았다. 각국의 강바닥이 드러나면서 프랑스의 루아르강 일부는 도보 횡단이 가능했고, 세르비아 다뉴브강에서는 2차대전 때 침몰한 군함이 드러났다.

독일 라인도르프에서 가뭄으로 인해 '헝거 스톤'이 드러나 있다. 헝거 스톤은 중부 유럽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선조들이 놓은 수문학 징표로 알려져 있다. 연합뉴스

독일 라인강 등지에서는 선조들이 "내가 보이면 울어라" 등의 문구를 새긴 바위 '헝거스톤'이 발견됐고, 스페인의 한 저수지에서는 거석 유적 '과달페랄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유럽 전역에서 수백개 마을이 트럭으로 먹을 물을 제공받는 등 식수난을 겪었고, 유럽 각지 농작물이 말라 죽으면서 예년 대비 20%대 생산량 감소가 우려됐다. 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라인강 등지 운하도 기능이 제한돼 물류에도 타격이 발생했다. 폭염과 가뭄의 중첩으로 산불도 잦아 유럽 전역에서 평년 대비 약 3배 빈발했다.

가뭄이 최악 수준이던 8월 11~20일 유럽의 지역별 피해현황 위성사진. 색이 붉어질수록 심각성이 크다는 의미다. 유럽연합 코페르니쿠스 관측시스템 웹페이지 캡쳐

뿐만 아니라, 가뭄은 러시아의 '가스밸브 차단' 조치로 에너지 위기가 임박한 유럽에 에너지 위기까지 가중시켰다. 저수량이 줄면서 직접적으로 수력발전이 타격을 받았고, 냉각용수 자원이 부족해짐에 따라 원자력·화력 등 다른 발전설비도 지장을 받았다.

올여름 전년동기 대비 수력발전량은 오스트리아가 3분의 1 줄었고, 이탈리아·프랑스·포르투갈 등도 10% 이상 감소했다. 프랑스는 원전 가동을 축소하기도 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유럽은 가뭄으로 해마다 90억유로(약 12조원) 규모 피해를 보는데, 극심한 가뭄이 더욱 빈발하고 있다. 2100년 무렵에는 가뭄에 따른 연간 손실이 400억 유로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남부 뉴멕시코주 시에라 엘리펀트 뷰트 저수지의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모습. 뉴멕시코에서 손꼽히는 대형 저수지이지만, 가뭄으로 인해 곳곳에 바닥이 드러났다.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미국 서부에서도 기록적 폭염과 함께 '1200년래 최악'이라는 가뭄이 발생했다. 미국 기상청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주 일대에서 최근 곳에 따라 43도까지 기온이 치솟았다.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인 파월 호수는 역대 최저수위를 기록했고, 캘리포니아 북부 일대에서는 산불이 빈발했다.

유럽은 가물고 5000km 밖 파키스탄은 홍수를 겪는 역설적 상황은, 지구온난화 탓에 북극과 아열대의 제트기류들 경로가 왜곡되는 등 대기순환 체계가 제 기능을 못하면서 벌어진다.

뜨거운 공기가 유럽에 장기간 묶이면서 비로 내리지 못한 수증기가 다른 곳에 몰리면 그곳에 물폭탄이 터지게 된다. 겨울철 한파 역시 북극 제트기류가 취약해져 찬 공기를 북극에 가둬두지 못하면 발생한다.

앞으로는 우리가 알던 대기순환 체계가 '정상이 아닌' 뉴노멀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페테리 탈라스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은 최근 유럽 상황에 대해 "기후변화로 폭염이 더 자주 발생한다는 게 이미 UN에서 입증됐다. 앞으로는 현 수준의 폭염이 '정상'이 되고, 훨씬 강렬한 극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대기 중에 너무 많은 이산화탄소를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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