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를 처음 해 봐서 몰랐다."
지난 5일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정재호 대사가 한 말이다. 20여 명 이상 모였던 특파원들은 귀를 의심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했던 말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인을 대동하고 봉하마을을 방문한 것과 관련해 제2부속실을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는 질문에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기 때문에…"라고 답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런 논란을 모를 리 없는 정 대사는 왜 고교 동창인 윤 대통령을 바로 생각나게 하는 발언을 했을까?
정 대사는 취임식에서 중국식으로 첫째, 둘째…이런 식으로 나눠가면서 대사로서의 포부를 밝혔는데 이 중에 하나가 소통이었다. 정 대사는 브리핑 자리에서도 한중간에 소통이 가장 필요한 때 소통 창구가 닫히는 경우가 많았다며 위기 시에도 닫히지 않는 소통창구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기자가 관련된 질문을 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서비스무역박람회에 주말에 대사가 다녀오셨지만 보도자료도 없었는데 배경이 있었냐면서 바쁜 9월이 지나면 특파원들과 식사도 하면서 편한 소통을 하자고 했다.
여기서 그 발언이 나왔다. "대사를 처음 해서 잘 몰랐다. 특파원들과 같이 가야 하는지 몰랐다. 보고 받지 못했다. 상세히 검토해서 항상 있었던 관례라고 한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기자 질문은 특파원들과 왜 같이 가지 않았냐는 게 아니라 작년과 재작년에는 대사가 행사에 참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알리고 보도자료까지 냈는데 이번엔 왜 안 낸 건지를 물은 것이었다. 질문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대충 둘러대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것 같았지만 "대사를 처음해서 몰랐다"는 말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이어진 대사의 발언은 기자들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밥 먹으면서 편하게 소통하자는 요청에 다른데 챙길 곳도 많고 업무추진비도 없다고 했다. "좀 기다려 달라, 업무추진비 넉 달 치를 행정직원 추석 선물에 기부했다. 내년에 밥 먹을 기회를 한번 모색하겠다"고 했다.
기자들이 밥 사달라고 애걸하는 것은 아니다. 또 중국 대사가 기자들이나 만나고 다닐 만큼 한가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특파원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여럿이 밥 먹을 때 대사가 하는 말에 영양가가 없을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전임 대사가 교민사회는 물론 기자들과의 소통이 썩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참으로 의외였다. 주중 대사관과 주중 특파원 간에 소통도 안 되는 데 교민사회와의 소통이나 한중간에 소통이 되겠냐는 생각이 나올 법 했다.
업무추진비를 행정직원 추석선물에 다 썼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지 채용 행정직원 처우가 특히 낮은 것은 문제지만 제도적으로 접근해야지 대사 업무추진비로 할 일이 아니다. 2년 전 국정감사에서도 장하성 대사가 의원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던 부분이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난해에 10% 가량 개선됐다.
덧붙이자면 업무추진비와 직원사기 진작 비용은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교수가 연구생들에게 선심 쓰듯 할 돈이 아니다.
김영란법 얘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법은 김영란법은 한 끼 식사에 우리 돈으로 3만 원을 안 넘는 선에서 공무원과 기자의 만남을 허용하고 있다. 베이징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한국만큼은 아니다. 정 대사가 대사를 처음 해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150위안이면 배가 터질 정도로 충분하다. 소통하자는데 김영란법을 들고 나오는 것은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듯하다.
정 대사는 대사와 특파원들 간에 브리핑 자리도 최근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 외에는 없다면서 특파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특권처럼 생각하지 말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브리핑을 일방적인 시혜의 자리로만 볼 문제도 아니다. 대사관에서 모르는 일이나 교민들의 아프고 가려운 부분은 특파원들이 더 잘 알 수도 있다. 기자들이 무슨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를 잘 관찰하면 대사관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
정 대사의 이날 브리핑은 냉소적이었고 비꼬는 투였고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전문 외교관들은 주재국 인사를 만나든 교민들을 만나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정 대사가 얘기했던 주미 대사관의 조태용 대사가 일전에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졌던 간담회의 발언 내용을 구해서 읽어봤으면 좋겠다. 조 대사의 발언엔 베테랑 외교관 출신 대사의 식견과 품격이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