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조의 회화는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원기둥 기조를 근간으로 한다. 그의 작품에 파이프 형상이 처음 등장한 건 1967년 선보인 '핵' 연작 중 하나인 '핵 10'을 통해서다.
작업 방식은 이렇다. 먼저 마스킹테이프로 캔버스에 경계를 지정한 뒤 납작한 붓으로 유화를 입혔다. 붓의 가운데 부분에는 밝은 색 물감을, 양쪽 끝에는 짙은 색 물감을 묻혀 각 색 띠의 한 면을 한 번에 그을 수 있었다.
붓질을 반복하다 보면 색 간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라데이션이 생겨나 3차원적 입체감이 형성됐다. 색을 칠한 후 화면을 사포질하면 윤기가 흘러 금속성의 환영이 더해졌다.
'핵 77'을 시작으로 이승조의 작품에는 파이프 형상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화면 안에 평면성과 입체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으로 꼽힌다. 1971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했을 때 출품하기도 했다.
이승조에게 1968년은 화가로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동아국제미술전 대상을 비롯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시작으로 1971년까지 4회의 국전에서 잇달아 수상했다.
25년간 짧고 굵게 활동한 이승조는 1962년 권영우, 서승원 등과 함께 전위미술 단체 '오리진'을 결성하고 한국 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보수적 구상회화 중심의 국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며 제도권 미술의 흐름을 바꾸고 전위미술이 주목받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이승조는 해방 공간기(1945~1948)에 가족과 함께 남하했고,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뉴욕 현대미술관, 국림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