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일(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11월 13일까지)에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다. 5년 동안 공들여 기획·제작(스포트라이트·문화아이콘)했다. 안경모가 연출, 뮤지컬 '아랑가'의 김가람(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이 극본을 맡았다. 김지영 역은 소유진과 임혜영, 박란주가 캐스팅됐다.
안경모(52) 연출은 최근 CBS노컷뉴스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원작이 여성 당사자성에 입각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여성만의 문제로 한정돼 있지 않다고 여겨 작업에 참여했다"며 "연극은 여성 개인, 남성 개인을 부정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소설의 성적 차별의식이 사회의식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그는 "정통 페미니즘 시선에서 보면 기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원작이, 페미니즘 대표소설이 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젠더 갈등이 혐오로 번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며 "우리 사회가 인간 만들기(출산·양육·살림)를 책임지지 않으면 '김지영들'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상실감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연극반 출신인 안 연출은 1997년 뮤지컬 'X라는 아이에 대한 임상학적 보고서'로 공연예술 연출을 시작했다. 이후 연극을 중심으로 무용, 전통, 뮤지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연출 작업을 하고 있다. 연극 '해무', '그리고 또 하루',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 전통 '소춘대유희_백년광대' 등을 연출했다. 미국의 인종 차별과 노동 문제를 다룬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으로 지난해 제23회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했다.
"저는 성·장애·노동·인종 등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다양성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많이 해 왔어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연극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작업으로 이어졌죠. 원작이 여성 당사자성에 입각하기에 부담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이 여성만의 문제로 한정돼 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함께 하고자 작업에 참여하게 됐어요."
▷원작에서 특별히 어떤 부분에 공감했나
"소설이 처음 발간됐을 때 대형문고에서 소설 앞 단락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나왔던 기억이 있어요. 이 당연한 시선이 왜 논란이 될까 하는 의문이 있었죠.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 많이 경직돼 있다고 여겨졌어요. '낡은 것은 가고 새 것은 오지 않았다'는 말도 떠올랐죠. 원작은 대단히 보편적인 이야기에요. 그래서 제게는 김지영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친구의 모습처럼 느껴졌죠."
▷원작을 연극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떤 점이 어려웠고 어떤 지점을 고민했나
"김지영의 유년시절부터 결혼 후 육아시기까지 다루는 소설의 방대한 이야기를 연극에 적합하게 분절하고 극적으로 바꾸는 게 과제였죠. 여성에 대한 사회의식의 답습과 구조화에 초점을 맞춰 에피소드를 압축하고 장면화 하는데 목표를 뒀어요. 그럼에도 사회 곳곳에 왜곡된 관습들이 적지 않다 보니 장면 수가 많아졌고 대신 빠르게 전개하죠. 정통적 페미니즘 시선에서 보면 기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원작이, 페미니즘 대표소설이 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어요. 젠더 갈등이 혐오로 번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도 컸죠. 여성 개인, 남성 개인을 부정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소설에 등장하는 성적 차별의식이 사회의식이라는데 초점을 맞춰 작업했어요."
▷연극이 소설,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뭔가
"김지영의 빙의를 단순히 병리적 문제가 아닌 정체성 상실의 상징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나아가 사회가 어떻게 여성을 양육시키고 대상화시키고 또 사다리를 걷어차고 유리천장을 만드는지 담아내려 했죠.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까지만 그리고, 영화가 빙의의 인식과 개선에 주목했다면, 연극은 정체성을 상실한 김지영에게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게 뭔지에 무게중심을 뒀어요. 또한 남편 정대현의 존재가 소설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영화에서는 현실부부다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연극에서는 아내 김지영의 상황을 인식하고 삶과 경험을 함께 느끼고 동행하는 존재로 만들려고 했죠. 아울러 작품 전체에 희극적 색채를 가미해 낡은 관습들이 풍자와 해학으로 전해지기를 기대했어요."
▷연극 작업하면서 원작자인 조남주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나
"조남주 작가의 집필기간과 맞물려 함께 논의한 것은 없어요. 다만 조 작가가 연극 작업을 응원하면서 제작진과 관객에게 '무거워질까 마주하지 못하는 이에게, 도망치고 있는 저에게 건네는 다정하고 용감한 손길'이기를 기대했죠."
▷82년생 김지영 역할로 소유진, 임혜영, 박란주 세 배우를 선정한 이유가 있나
"소유진(41) 배우는 육아 당사자로서 본인이 경험한 정체성 혼돈과 상실의 순간, 그리고 회복의 모습을 진심으로 표현해내고 있어요. 매체에서 더 두각을 나타낸 배우이지만 무대 경험(연극 리어왕·꽃의 비밀)도 많아 김지영의 밝음과 어두움을 대비감있게 그려내고 있죠. 임혜영(40) 배우는 실제 82년생으로 직접 경험하고 거쳐 온 세월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어요. 뮤지컬 무대로 관객을 주로 만났지만 무대 경험이 풍부하고 성격이 섬세해서 인물의 깊이를 잘 표현하고 있죠. 박란주(34) 배우는 현재 시점의 김지영과 비슷한 나이대로, 우리 사회 여성의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다채로운 연기로 김지영의 삶에 다양한 색감을 입히고 있죠."
▷연극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2022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
"김지영은 1982년 한국에서 태어나 여성에 대한 사회의식을 만나고 출산·양육을 거치며 자신을 상실했어요. 사회가 인간 만들기(출산·양육·살림)를 책임지지 않으니까 또 다른 김지영이 계속 탄생하고 있죠. 사회노동에서 밀려나고 관계망에서 떨어져 나갔으니 스스로 사화적 존재감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을 대상이자 도구로 전락하도록 사회가 부추기기에 우리 모두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죠. 사회가 금방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상실감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거에요. '나한테는 내가 있어.' 이번 연극의 메인 카피인데요.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연극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이러한 공연을 연출할 때 각별히 주의하는 점이 있나
"모든 예술작품은 가장 어두운 곳, 아이러니한 곳, 감춰진 곳, 골이 깊은 곳을 포착해야 해요. 그 시좌(視座·사물을 보는 자세)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예술의 사회적 소임이기도 해요. 다양성의 맥락에서 많은 주제를 다룰 때마다 제가 그 당사자는 아니라는 한계를 느껴요.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의 경험과 감정, 누적되고 각인된 감각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다뤄야 해요. 함부로 재단해서도,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해서도, 모든 걸 대리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되죠.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에요. 저 스스로도 아직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크지만 점점 좁혀가는 과정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