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한반도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이다.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협상에 나오기만 해도 보상책을 제공하겠다는 것으로 기존 대북정책과 제일 차별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정부 구상과 달리 엄격한 유엔 제재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아 실현 가능성은 크게 의문시된다. 설령 유엔의 동의를 얻더라도 북한이 호응해올 가능성 역시 매우 낮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비핵화와 경제협력을 교환하는 대북 제안을 발표한데 이어 16일 기자회견에선 북미관계 정상화 지원 등 정치‧군사 공약을 추가했다. 일단, 북한의 최우선 관심사인 체제 안전에 관한 언급을 처음부터 전면에 내걸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윤 대통령은 16일 회견 때 질문답변을 통해 "체제 안전보장이라는 건 대한민국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면서도 "저나 정부는 북한 지역에 어떤 무리한 힘에 의한 그런 현상 변경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상 체제안보를 지칭한 전향적 발언이다.
어차피 밝힐 내용이라면 상징성이 큰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의 입으로 직접 공약하는 게 훨씬 임팩트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 같은 주목할 만한 제안을 대통령 대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발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尹 담대한 구상, 비핵화 협상 입구에 보상책 제공…기존 정책과 차별화
어쨌거나 이제 정부의 급선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면제를 얻어내는 것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16일 "안보리 제재위에서 제재 면제를 심사하는 것은 기본 원칙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는 미국과도 상당한 협의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하지만 미국 측 기류는 꽤 다르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7일(현지시간) 한국 정부의 구상을 지지한다면서도 "북한이 근본적인 행동과 접근법을 바꿀 때까지 제재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제재 해제는 제재 면제와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 면제는 예외적 조치를 잠정적으로 취하는 것으로 제재 유지와 충분히 병립할 수 있다. 미 국무부의 입장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선전매체 격인 미국의소리(VOA) 방송의 15일 보도는 미국의 보다 솔직한 속내를 보여준다. 이 방송은 "광물과 희토류 등 북한의 제재 품목을 대가로 음식과 의료장비 등 비제재품을 지불하는 건 여전히 제재 위반"이라는 유엔 안보리 관계자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해당 품목에 대한) 북한의 수출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지불되든 현행 결의에 반하게 될 것"이라며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이에 대한 (제재) 면제를 고려하거나 승인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이는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이 북한의 석탄 등 광물 수출을 금지한 안보리 결의 2371호와 정면충돌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광물 수출은 약 10억 달러 규모로 외화벌이의 1/3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결의는 '제재 끝판왕'이라 불릴 만큼 강력하다.
제재 신봉하는 美가 동의할지 의문…영변 포기에도 北 요구 거절한 전례
만약 미국이 제재 면제에 동의한다면 안보리 이사국을 설득하는 것은 일사천리로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북한뿐 아니라 러시아와 이란 등을 상대로 제재를 만능 수단으로 사용하며 신봉하다시피 하는 게 미국이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결의 2371호를 포함한 5건의 제재 가운데 민수 분야만이라도 풀어달라는 요구를 미국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것도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북한이 협상장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광물 수출 허용이란 선물을 주는 것에 미국이 선뜻 동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도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의 대북 지원마저 운송수단(트럭) 반입을 문제 삼아 반대한 전력이 있다.
이와 관련,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남북‧북미 관계가 '봄날'을 맞던 2018년 상황에서도 "남북관계 특수성을 근거로 유엔 제재위에 남북경협 전체 혹은 사업 건별 신청을 하자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제재 정신에 위반된다"며 소탐대실이 우려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외견상 전향적 제안에도 전문가 평가 냉정…北 입장에선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
설령 어렵사리 미국과 유엔을 설득한다고 해도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다. 외견상으로는 제재 면제라는 보상책을 협상의 입구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인책이 될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이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에 호응해올 가능성은 제로(0)라고 단언했다. 그는 "북한 식량 사정이 (알려진 것과 달리) 특별히 심각하지 않고, 만약 필요하다면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더 중요하게는, 북한이 정작 요구하는 한미군사훈련 중단에 대해서는 답을 안 하고 엉뚱한 것을 얘기하면 마이동풍"이라면서 "당장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한미훈련은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뻔하다"고 말했다.
제재 면제와 해제의 차이점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제재 면제는 임시적, 잠정적 조치라는 점에서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면제 정도로는 어렵다"고 말했다.
만약 제재가 해제될 경우 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만장일치로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 지금의 미국-중국‧러시아 관계를 감안하면 제재 복원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선 당연히 '해제'를 절대적으로 선호할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미국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고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상 대적 관계로 전환한 상황이다. 임 교수는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뭘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북한이 우리에게 의존하고, 우리가 북한 경제 건설을 지원해줄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