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버텨, 여기서 다 해결하고 있으니까."
베테랑 형사팀장 인호는 수사 업무가 밀려 아내와의 휴가를 취소하고 평소처럼 서에 출근한다. 인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비행기 테러를 예고하는 동영상을 접한 후, 이 영상의 주인공이 부디 아내가 탄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기만을 기도한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고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지상으로 돌릴 수 있도록, 그리고 아내가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재난 해결에 몸을 던진다.
배우 송강호가 '살인의 추억'(2003) 이후 오랜만에 형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테러가 발생한 항공기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지상에서 고군분투하는 형사다. 매 작품 '송강호답게' 작품에 녹아들어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가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으로 관객 앞에 섰다. 무엇이 그를 '비상선언'으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전도연 이병헌부터 임시완까지 화려한 캐이팅 라인업을 보며 놀랐던 이유가 무엇인지, 지난 7월 27일 화상으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인물 인호
▷오랜 기다림 끝에 '비상선언'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된 소감을 듣고 싶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국만 아니었으면 작년 여름에 개봉할 영화였는데, 아쉽게 그때 못했다. 오히려 잘된 거 같다. 왜냐하면 기분 좋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상태에서 소개가 되어야 하는데, 물론 팬데믹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다른 영화도 많아서 같이 붐업되는 상황이라 너무 좋다. 한국 영화가 다 잘됐으면 좋겠다. 그동안 산업적으로도 그렇고, 관객분들이 영화를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상태였다. 여름 영화 경쟁이 아니라 다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 났을 때 어떤 감상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왜 '비상선언'에 출연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지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한재림이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남다른 지점이 있다. '우아한 세계'도 조폭영화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조폭영화가 아니다. 직업이 조폭인 인물을 통해 삶의 애환을 이야기했듯이 '비상선언'도 재난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이야기도 하고, 우리가 평소에는 잘 못 느끼는 새삼 소중한 가치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비상선언' 시나리오를 보고 목표는 장르적으로 재난물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이야기한다는 게 가장 큰 매력으로 와 닿았다.
▷ 인호를 비롯해 영화 속 캐릭터들은 특별하게 눈에 띄거나 과장되거나 하지 않고 현실에 발붙인 인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속에서 인호를 연기하면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
인호는 형사팀장이다. 출근해보니 제보가 들어왔는데 움직인다. 그건 직업의식이다. 직업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재난의 중심부에 들어간 거다. 그러면 이게 직업의식과 남편으로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의 심정, 이런 것들이 막 뒤섞이는 거다.
초반 국토부 장관과 주요 인물들이 회의하는 지점에서 들어갈 수 없는 자리인데도 들어가는 건 직업의식과 가장의식이 융합되어 자기도 모르게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게 인호의 현 위치이자 이 작품 내 위치에서 가장 적절한 지점인 거다. 합리적인 어떤 위치를 찾아야한다는 딜레마가 있더라. 어떤 구역을 침범해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런 지점들이 상당히 어렵기도 하고 절묘하기도 하고 했다.
▷ 인호는 직업의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결합해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인호가 주인공이 아니라 인호로 대변되는 우리의 마음이 캐릭터에 녹아나지 않았나 싶다. 인호 한 개인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모두의 마음이 인호에 담겨 있고, 그걸 대표하는 인물이다. 인호라는 캐릭터 자체가 영웅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간절한 마음,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재난을 막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인호로 대변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가능하구나!"…송강호가 놀란 지점들
▷ '비상선언'은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으로도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캐스팅 라인업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이런 영화도 가능할까? 이병헌, 전도연, 임시완, 김소진, 김남길…. 여기에 승객으로 훌륭한 연기를 펼친 수많은 배우까지 그 면면을 보면 다 대단한 배우들이다. 그래서 이게 너무 불가능할 거 같은 그런, 정말 환상의 느낌? 기쁘다기보다 이것도 가능하구나! 이게 너무 벅찬 느낌이었다.
▷ 전도연, 이병헌과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된 만큼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두 분 다 너무너무 좋아하고, 또 존중하는, 20년 넘은 동료이자 허물없는 동료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라 너무 기분이 좋고 같이 출연한다는 게 기뻤다. 이병헌, 전도연씨와 같이 작품하고 이번에 '비상선언'에 다 모여서 한 게 거의 한 15년 정도 된다. 이병헌씨는 비행기, 난 지상이라 영화에서 만나는 장면은 거의 없지만 난 이병헌씨 연기할 때 놀러 가고 이병헌씨도 나 연기할 때 놀려오는 식으로 꾸준히 만났다. 전도연씨하고도 사실 많은 교감이 있는 역할은 아니라서 좀 아쉽지만, 같이 출연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대한민국 최초 360도 회전하는 초대형 비행기 세트를 구현한 현장이었다. 비록 비행기에는 탑승하지 못했지만, 세트를 본 적이 있나?
봤다. 처음에는 비행기 안에서만 촬영하니 편안하고 얼마나 좋을까 했다. 반면 나는 지상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비도 맞고 액션도 해야 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부러웠다. 그런데 한번 가서 짐벌이 360도 돌아가는 걸 보고 나서는 '아, 지상에 있는 게 좋구나. 정말 행복한 거구나.' 싶었다.(웃음) 촬영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실제로 카메라를 들고 몸을 묶고 비행기와 같이 360도 돌았다. 배우들도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무진장 고생했다고 하더라. 참 대단한 장면을 구경하고 왔다.
▷ 영화 전반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임시완이 맡은 캐릭터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증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정말 멀쩡한 사람이 저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공포감, 생경함, 이런 것들이 굉장히 놀랍기도 했지만 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묻지 마 폭행' 등 '묻지 마 범죄'를 목격한 느낌이랄까? 일어나면 안 되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지만, 평온한 일상 속에서 그런 말과 그런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걸 보며 현실 공포감을 절절하게 느꼈다.
▷ 정말 수많은 캐릭터가 함께하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매력 있는 캐릭터 혹은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는 어떤 캐릭터라고 생각하나?
인호도, 재혁도 아닌 승객들이 주인공인 거 같다. 공포와 절망 속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 이 모든 걸 함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이다. 승객들은 우리의 모습이자 우리 주변의 이웃이다. 그래서 난 승객이 이 영화의 주인공 아닐까 생각한다. 매력 있는 캐릭터는 인호겠죠? 하하하하하. 농담입니다.(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