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산하 경찰국의 초대 국장을 맡은 김순호 치안감이 보안대에서 '특수망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노동 운동 동료들을 경찰에 밀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국장은 "소설 같은 소리"라고 일축하지만 과거 함께 운동했던 동료들의 의문 제기로 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9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김 국장은 성균관대 재학 중 운동권 서클에서 활동하다가 1983년 4월 7일 '시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군에 강제 징집됐다. 그는 같은 해 11월 17일 국군보안사령부 심사를 받고 녹화공작(학생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강제 징집 대학생들에게 프락치 활동을 통한 정보 수집을 시킨 일) 대상자가 됐다.
당시 함께 강제 징집돼 녹화공작 대상자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국장은 적극적 활동을 하는 '침투 망원(프락치)'에 해당했다. 녹화공작 대상자는 군부독재의 피해자에 해당하지만, 김 국장의 경우엔 해당 활동을 제대 후에도 이어갔고 결국 경찰 입직에 활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제대 후 노동 현장에 복귀한 김 국장은 1989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에 들어가 지구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989년 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머지않아 잠적했다. 그해 8월 김 국장은 '대공 공작업무 관련자'로 특채 대상에 포함돼 경찰에 입직했다.
인노회 출신이고 김 국장과 강제징집 동기였던 윤병기(61)씨는 "대공업무와 관련된 경력으로 경찰에 특채된다는 건 보이지 않는 프락치 활동 경력이 인정됐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녹화사업에서 협박이나 회유에 굴복하면 망원이 되는데 종교계 및 노동계에 침투시키는 적극적 의지를 가진 망원이 '침투 망원'이었다"고 덧붙였다.
강제징집녹화공작진실규명위원회 조종주 사무처장은 "강제 징용자 중 녹화공작 관리를 받던 사람 상당수는 제대 후에도 1년에서 1년 반 동안 보안대로부터 계속 접촉과 정보 제공 요구를 받았다고 얘기한다"며 "경찰 입직 후 계속 그쪽 일을 한 것은 이전부터 깊이 개입돼 관계가 돈독히 형성돼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 국장은 경장으로 특채된 후 치안본부 대공수사3과에서 경력을 시작해 경찰청 보안5과, 보안4과 등 90년대 말까지 대공수사·보안업무를 담당했다. 대공수사3과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은폐 보고서를 만든 홍승상 전 경감이 속해 인노회 수사를 맡았던 부서이기도 하다. 홍 전 경감은 김 국장으로부터 인노회 수사 도움을 받아 김 국장을 특채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게다가 김 국장과 함께 강제 징집된 복수의 이들은 "김 국장이 외박과 외출이 금지된 부대에서 애인이 왔을 때 쉽게 외박했다"고 증언하며, "여러 정황상 김 국장이 보안대에 공을 많이 세웠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반면 또 다른 인노회 회원 A씨는 "녹화공작 대상자 중 특수한 조사를 거치는 이들은 '귀 사령부의 업무 협조 요구 시 만사를 제쳐놓고 적극 협력하겠다'는 각서를 쓰는데 프락치가 되겠다는 서약이나 다름없다"며 "프락치 활동이 중요했다기보다 심리전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김 국장이 잠적한 1989년 4월 경찰에 연행돼 홍승상 전 경감을 만나 동료들을 밀고한 것으로 보인다"며 "4월까진 부천에 있었고 이후 고향에 내려갔다고 하는데 직접 광주 집에 찾아갔을 때 김 국장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 국장은 당시 경찰 시험공부를 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당시 한국 사회 학생 운동가 중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안 한 사람은 없다"면서도 "그 고민과 경찰에 밀고하는 건 별개"라고 지적했다. 그는 "내적 갈등 겪는 후배들은 모임에 안 나오기 시작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등 두세 단계를 거치는데 김 국장은 그게 없었다"고 전했다.
앞서 김 국장은 제기된 의혹과 관련해 인노회 수사가 마무리된 시점(1989년 7월)에 경찰에 자백했고,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전향한 것이라는 식의 해명을 한 바 있다. 그는 CBS노컷뉴스에 "모두 사실과 다르다. 곧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