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당구 무대를 주름잡을 줄 알았다. 함께 여자 3쿠션 아마추어 최강을 다퉜던 '캄보디아 특급' 스롱 피아비(블루원리조트)가 불과 2번째 대회 만에 프로당구 여자부(LPBA)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스롱은 지난 6월 2년 연속 개막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벌써 3번이나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하지만 김민아(32·NH농협카드)의 정상 등극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대한당구연맹(KBF) 시절인 2019년 4관왕 등 3쿠션 랭킹 1위에 세계 랭킹도 6위까지 올랐던 김민아였지만 프로 무대는 쉽지 않았다.
김민아는 프로 데뷔 시즌인 2020-2021시즌 4개 대회에서 2번 8강에 올랐다. 지난 시즌 개막전인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에서 4강에 오르며 완전히 적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4강은커녕 8강, 16강, 64강에서도 탈락했다. 지난 시즌 성적은 10승 9패, 간신히 승률 5할을 넘겼을 따름이었다.
그런 김민아가 드디어 LPBA 정상에 올랐다. 김민아는 지난달 20일 '하나카드 PBA-LPBA 챔피언십'에서 여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 14개 대회 만에 들어올린 우승컵이다.
특히 KBF 시절 동갑내기 라이벌이었던 스롱을 꺾고 거둔 우승이라 더 의미가 있었다. 김민아는 스롱과 결승에서 세트 스코어 1 대 3으로 뒤지다 내리 세 세트를 따내며 4 대 3(10-11 11-3 4-11 7-11 11-5 11-4 9-4) 극적인 역전 우승을 이뤄냈다.
이에 앞서 김민아는 지난 6월 시즌 개막전인 '블루원리조트 챔피언십'에서 4강에 올랐다. 그러더니 2번째 대회에서 기어이 정상을 차지했다. 지난 시즌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무엇이 KBF 랭킹 1위 김민아를 깨어나게 한 것일까. NH농협카드 주장 조재호의 전용 훈련장에서 동료들과 팀 리그에 대비하고 있는 김민아를 만나 그 비결을 들어봤다.
지난 시즌 김민아는 스스로에 대해 기대감이 컸다고 했다. 시즌 도중 합류한 2020-2021시즌이야 적응하는 기간이라 쳐도 2번째 시즌에는 KBF 랭킹 1위의 진가를 보이겠다는 각오가 넘쳤다. 준비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게 발목을 잡았다. 개막전에서 4강에 올랐지만 성에 차지 않았고, 성적에 대한 부담감으로 이어졌다. 김민아는 "2번째 시즌이다 보니 빨리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겼다"면서 "다른 강자들은 2번, 3번 우승을 하는데 나는 결승 문턱도 가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4회 우승의 이미래(TS샴푸·푸라닭), 임정숙(SK렌터카)과 3회 김가영(하나카드), 김세연(휴온스)은 물론 강지은(크라운해태), 김예은(웰컴저축은행) 등도 2회 우승을 거뒀다.
특히 KBF에서 정상을 다투던 스롱의 승승장구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스롱은 프로 데뷔전인 2020-2021시즌에서는 32강 탈락으로 쓴잔을 봤지만 지난 시즌 우승만 2번에 준우승도 2번 차지하며 LPBA 최정상급 선수로 우뚝 섰다. 김민아는 "스롱이 훨훨 날아다니니 솔직히 배도 아프고 그렇더라"고 웃었다.
압박감과 열등감은 부진한 성적에 절망감으로 변했다. 김민아는 "언니와 동생들은 저렇게 우승을 하는데 왜 나에게는 한번의 기회도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 "다른 선수들은 기량이 나아지는데 나만 도태되는 건가 위축이 됐다"고 했다. 이어 "해봐야겠다는 독한 생각보다 안 된다는 부정적 생각이 많았다"면서 "한 마디로 암흑 속에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시즌을 마친 뒤 한 통의 연락이 왔다. 다름 아닌 스롱에게서였다. 김민아는 "스롱이 고국인 캄보디아로 가면서 전화를 했다"면서 "스롱이 '많이 속상하지?'리고 물어보더라"고 운을 뗐다. 이어 "한 시즌 고생이 많았다"면서 "부진해도 괜찮아, 어차피 넌 잘 할 거니까 기죽지 마"라는 스롱의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들려줬다.
김민아는 "그때 눈물이 핑 돌더라"고 말했다. 경기장에서 만나면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민아는 "90년생 동갑내기라 워낙 친하지만 경기장에서는 스롱이 그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속상한 마음을 알고 얘기해주니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사실 김민아는 KBF 시절 스롱에 살짝 열세였다. 김민아는 "10번 대결하면 4번 정도 이겼던 것 같다"면서 "그래서 장난으로 '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애야'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애증의 라이벌이 건넨 위로에 마음고생을 적잖게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김민아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완전히 마음을 내려놨다. 빨리 우승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버렸다. 김민아는 "사실 상위에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다"면서 "주위에서 기대해도 나 스스로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대한 게 있었다"고 반성했다. 이어 "기대하는 시기는 놓쳤고 어차피 늦었다"면서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경기하자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비시즌 동안 기술은 물론 정신적인 부분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김민아는 "스포츠 심리학 서적을 많이 봤다"면서 "다른 종목 선수들도 멘털이 중요한데 어떻게 극복하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은 긍정적인 생각이더라"면서 "지난 시즌에는 서바이벌에서 1등 하고 있는데도 불안해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생각하면 여지 없이 현실이 됐는데 올 시즌에는 마음을 비웠더니 먹혔다"고 강조했다.
개막전 결승행 무산이 약이 됐다. 김민아는 "이미래와 4강전 때 결승이 눈앞에 보이니까 욕심이 생겼다"면서 "지면 어쩌지 겁을 먹었더니 졌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래서 '하나카드 챔피언십' 때는 더 마음을 비웠고, 결국 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숙명의 라이벌 스롱과 결승을 기다려왔다. 김민아는 "결승에서 스롱을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민아는 "KBF 시절부터 너무 잘 지내왔는데 항상 선수로서 내가 조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면서 "내가 스스로도 인정하는 선수를 중요한 순간 결승에서 이겨서 우승해야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승부처에서 결국 달라진 멘털이 빛났다. 김민아는 "1 대 3으로 지고 있는데도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면서 "지는구나 하는 불안감보다 (팬들이나 관계자 분들이) 나를 많이 응원해주는 장면 자체가 즐거웠고 이 시간을 더 즐기려면 한 세트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역전 우승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정상에 올랐고,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김민아는 "이번에 생각했던 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이게 답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기술과 실력에서도 많이 발전해야겠지만 원래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심리 상태가 돼야 한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이어 "훈련장에서 아무리 좋은 기술을 많이 보인다고 해도 경기장에서 안 되면 소용이 없다"면서 "실력보다는 정신 승리였다"고 강조했다.
드디어 스롱을 넘어 우승컵을 들어올린 김민아, 마음은 비웠지만 목표까지 비우진 않았다. 김민아는 "스롱과 라이벌이라 칭하기에는 더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면서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을 위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결승 뒤 스롱도 우승을 차지한 친구에게 "옆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봐왔는데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면서 "김민아 선수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박수를 보냈다.
KBF 무대를 양분했던 김민아와 스롱의 우정 어린 대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단 김민아는 5일부터 시작되는 '2022-23시즌 웰컴저축은행 PBA 팀 리그'에서 스롱 등 강자들을 상대로 챔피언의 샷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