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난' 말하면서 '임금 인상'은 못한다는 조선업계, 왜?[노동:판]

호황 돌아온 조선업 '인력난'까지 호소하는데…노동 조건만은 '불황' 못 벗어나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조선업 산재사망만인율, 전체 업종 평균보다 2.73배 더 높은데
불황기 최저임금 수준으로 깎인 시급은 아직도 제자리걸음
조선업계 "장부 속 호황이 실제 이익 이어지려면 2, 3년 더 기다려야…임금 올릴 여력 없다" 하소연
호황기에 불황 대비해야…'조선업 고용안정기금' 조성 논의도 거론
"기금 조성하려면 노사의 장기적 안목과 상호신뢰가 있어야…향후 임금 인상 계획부터 수립하자" 제안도

22일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사가 협상을 타결한 가운데, 지난 20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인근으로 행진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51일 동안 계속됐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하지만 불황기마다 임금 삭감, 대량 해고를 반복하는 조선업계의 노동 조건이 과연 이번에는 개선될 수 있을까.

'인력난' 말하면서 임금 인상은 거부…"위험하고 힘든데 돈도 안 주면 누가 조선소에 가겠나"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들과 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지난 22일 막판 교섭 타결에 성공했다. 지난달 2일 파업에 돌입한 지 51일,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을 점거 농성하기 시작했던 지난달 18일로부터는 31일 만이다.

이번 파업의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는 댓글부터 맹비난하는 댓글까지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간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옮겨 최근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나 기업 담당 관련 기자들이 주로 쓰는 조선업계의 '인력난'에 관한 기사의 댓글을 살펴보면 한결같은 불만들이 터져나온다.

"일만 힘들고 돈은 못 버는 곳에 갈 젊은이들은 이제 더 없다", "소음, 위험성, 분진 모두 건설업이나 공장보다 훨씬 열악한데 돈은 최저임금 수준, 한 달이면 2/3은 도망가고 반년이면 전부 도망간다", "더럽지 덥지 춥지 위험하지 돈이 많나 복지가 좋나 누가 일하냐", "경기 불황이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다 자른 걸 온 국민이 봤는데 누가 일하고 싶겠나"…

대우조선 하청업체 노사 협상단. 이형탁 기자

국내 조선업계가 불황의 터널을 지나 호황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 상반기 국내 조선업계는 전 세계 발주량 45.5%를, 수주금액도 전체 금액의 47%를 거둬들여 두 지표 모두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대우조선은 올 들어 59억 달러어치의 선박을 수주해 올해 목표치의 66%를 달성했다.

이처럼 국내 조선업계에 호황기가 돌아왔지만, 정작 일할 사람이 없는 '인력난' 또한 심각하다. 국내 조선업계 인력은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닥치기 전인 2014년 연말 20만 3천여 명을 넘었지만, 지난해에는 절반이 되지 않는 9만 명을 겨우 넘은 수준이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면 임금 등 노동 조건을 높여서라도 사람을 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선업계 현장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파업 사태를 놓고 업계에서 '터질 것이 터졌다'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하다 죽을 확률 다른 업종의 3배인데…최저임금으로 깎인 임금 회복도 안 돼

조선업의 근무 환경이 고되고 열악하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깝다. 거대한 배를 만들기 위해 장시간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벌여야 함은 물론이고, 일감이 몰리면 토요일 등 휴일 없이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열악한 업무 환경은 산업재해를 부른다.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산업에서 임금노동자 100명당 산재피해자 비율을 뜻하는 재해율은 0.63, 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망자 비중을 뜻하는 사망만인율은 1.07이고, 제조업의 경우 각각 0.80, 1.29를 기록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조선업에 해당하는 선박건조·수리업의 재해율은 2.28, 사망만인율은 2.92에 달했다. 조선업에서 산업재해가 일어나고, 사람이 죽을 확률이 다른 업종의 2~3배는 되는 셈이다.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 연합뉴스

산재의 칼날은 특히 노동 환경이 열악한 하청노동자를 겨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조선업계에서는 2016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88명이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었는데, 이 가운데 77%가 하청노동자였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조선업에 몰던 이유는 조선업이 비교적 고용이 안정적이고, 임금도 높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불황기를 겪으며 이러한 평가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그동안 해고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청노동자들이었다. 위에서 전체 조선업 인력 중 절반가량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는데, 2014년 조선업계에 일하던 하청노동자는 13만명이 넘었지만, 조선업이 불황을 맞은 2015~2020년 동안 60%가 넘는 7만 6천여 명이 해고당했다.

지난 불황기 대량 해고됐던 숙련공들은 조선업계를 떠나 '육상'의 건설현장이나 제조업 현장 등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고향이 조선소 근처여서, 다른 가족이 이미 자리를 잡아서, 새로운 일을 배우기에는 나이가 많아서, 함께 오래 일한 동료가 붙잡아서… 해고의 칼바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부 노동자들은 조선업 현장을 지켰다.

비록 일자리는 지켰지만 임금은 포기해야 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경우 2014년 당시 임금에 비해 지난해 임금 실수령액은 31.7% 감소했다. 20~30년씩 일한 숙련노동자조차 최저임금을 겨우 넘는 시급으로 월 200만 원 안팎을 간신히 받는 상황, 노조의 최초요구안대로 임금을 30% '정상화'해도, 물가인상을 고려하면 임금 삭감이나 다름없다.

조선사 "불황 충격 여전…장부만 호황일 뿐 아직 임금 인상 여력 없어" 하소연

하지만 조선업계는 지금의 호황기가 매출 상의 흑자일 뿐, 실제 현금은 손에 쥐지 못해 당장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하청업체들은 원청업체가 기성금을 풀어놓지 않으면 임금을 올릴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도 지난해부터 하청업체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별다른 성과가 없자 원청을 상대로 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스스로 용접한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 안에서 농성하고 있는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연합뉴스

대기업 조선업체들 역시 임금을 올릴 여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안정적인 일감은 손에 쥐었지만, 조선업계 특성상 지금 손에 쥔 수주는 배를 다 건조한 2~3년 후에야 현금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당분간 경영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유다.

이익이 실현되더라도 불황기 동안 중국, 일본 등을 상대로 경쟁을 벌이느라 낮은 가격에 수주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어 매출에 비해 충분한 이윤을 거두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게다가 최근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것도 고스란히 조선업체들의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를 이유로 정부는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기다리느니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지난 4월 산업부와 법무부는 관련 지침을 개정해 그동안 내국인 노동자의 20% 한도 안에서만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했던 조선 분야 용접공·도장공의 비자 쿼터제를 폐지한 바 있다.


호황-불황 반복하는 조선업, 고용안정기금이 해답? "노사 신뢰가 최우선 전제" 지적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업이 인력난과 노사 갈등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는 애초 조선업계가 호황과 불황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호황기에는 조선업이 목돈을 쥘 수 있는 업종으로 인기를 끌지만, 불황이면 임금 삭감, 대량 해고가 일어나면서 숙련노동자들이 떠나는 일이 되풀이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호황기에 무작정 수주를 최대한 따내고 인력을 대거 고용하다 불황기에 해고하는 방식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심도 있게 검토할 때가 됐다"며 "적정 수준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을 중심으로 꾸준히 물량을 유지하고, 그에 필요한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 고려해 숙련인력 고용을 지키는 방식도 고민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불황기에 대비하는 또다른 대표적인 대안이 조선업 고용안정기금을 조성하자는 제안이다. 호황기에 노사가 함께 기금을 축적하고, 불황기에 이를 인건비로 돌리자는 방식이다.

연합뉴스

문성현 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도 지난 2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잘될 때 불황을 대비한 고용안정기금을 원·하청의 노사가 만들고, 정부가 좀 보태주면서 조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선산업이 수주절벽에 몰렸을 때 이를 활용해 정부의 실업급여나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과 별도로 기업 단위 또는 산업 단위의 사회안전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거론됐던 고용안정기금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노사 간의 신뢰가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박종식 부연구위원은 "돈을 모으기보다는 당장 성과급으로 풀면 노동자들도 좋아하고, 사측도 인력 관리에 편리하니 노사 모두 기금 적립 방안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노사의 장기적인 안목과 상호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제안"이라고 지적했다.

대신 박 부연구위원은 "우선 사측이 당장 할 수 있는, 열악한 근무 환경부터 개선하는 움직임은 보여야 한다"며 "당장 성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조선해양플랜트협회 등을 통해 노사 간의 대화 창구를 마련하는 등, 조선업이 변하기 위해 노사가 함께 노력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기금까지 적립하기는 어렵다면, 노사가 당장의 임금만이 아닌 향후 2, 3년 동안 임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긴 호흡으로 협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며 "당장 임금이 오르지 않더라도 임금이 꾸준히, 충분히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노동자들이 조선소로 돌아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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