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7.6. 허준이 교수 필즈상 수상 기념 브리핑 |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어떤 수학문제를 풀면서 어려움에 맞닥뜨리거나 더 크게는 삶을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때마다 배워야 할 것이 다를 텐데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너무너무 잘 만났어요. … 제가 영웅으로 생각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이름, 그리고 그분들한테서 배우고 싶은 점들을 적어놓은 작은 수첩이 있는데 그들이 저에게는 다 롤모델입니다." |
수학 분야의 최고 영예인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고등과학원(KIAS) 석학교수가 롤모델을 묻는 질문에 작은 수첩 이야기를 꺼냈다. 그를 수학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알려진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의 이름이 나올 것이란 기대와 달리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영웅'으로 등장했다.
필즈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허 교수는 6일 오후 핀란드 헬싱키에서 영상으로 먼저 국내 언론에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가 수학자가 된 이후 일궈낸 성취들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허 교수의 입에선 자신과 생각을 나눠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허 교수는 서울대 학부를 6년간 다니다 마지막 학기에서야 수학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수학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수학자들에 비하면 출발이 늦었던 셈이다.
그러나 박사 첫 해에 리드(Read) 추측을 푼 것을 시작으로 40세가 되기 전 11개의 수학계 난제를 해결했다.
허 교수는 "열 손가락 중에 어느 손가락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든 것처럼 연구들마다 다 애정을 갖고 있다"며 "그 이유는 대부분이 공동연구로 진행되고 각 연구마다 같이 일한 연구자들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사람(공동연구자)과 내가 말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소통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낸, 소중한 경험"이라며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서 정답으로 귀결되는 과정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소중한 추억"이라고 회상했다.
보통의 수학자는 평생 한 개도 풀기 어렵다는 난제를 11개나 풀어낸 그는 그 난제들을 일생일대의 과제나 가파른 산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연구를 돌이켜보면 그 시기 만난 동료가 함께 보이는 "추억 속 앨범을 보는 듯 하다"고 표현했다.
수학의 매력 역시 '공동연구'라고 답했다. 통상 수학자를 생각하면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실에서 혼자 고독하게 사색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과 상반된다.
허 교수는 "현대 수학에서 공동연구가 굉장히 활발해졌다. 혼자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더 멀리,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 "효용성 측면에서 뿐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경험이 수학 연구자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손으로 물을 받는 그릇 모양을 만들며 "우리 하나하나가 생각의 그릇이라고 생각해보자"고 비유했다. 이어 양손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그릇 안에 든 물을 서로 주고받다가 물이 조금씩 (바닥에) 떨어지면서 줄어들 것 같지만 오히려 그릇을 옮길 때마다 물의 양은 두세 배씩 불어난다"고 말했다. 이를 반복하다보면 혼자 힘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난해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의 양이 충분히 커진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런 경험이 굉장한 만족감을 주고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십몇 년 전 수학의 매력에 빠진 이후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달뜬 표정을 보였다.
그는 '롤모델 수첩' 속에 수십명의 이름과 그들에게서 감명 받은 점, 배우고 싶은 점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학부 시절 그를 수학의 세계로 이끈 김인강 고등과학원 교수와 히로나카 헤이스케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 로타 추측을 공동연구한 에릭 카츠 오하이오주립대 교수, 카림 아디프라지토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 서울대 수학과 대학원 동기이자 지금의 아내인 김나영 박사 등이 수첩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날 브리핑에 함께한 최재경 고등과학원장도 "고등과학원 직원을 상대로 제가 쓴 시와 소설을 낭독했던 교양강좌 맨 뒷자리에 허 교수가 앉아있었던 적이 있다"며 "그날 밤 허 교수가 저에게 메일을 보내 '자신이 예전에 시를 쓰던 때 감흥이 되살아난다'며 미국 시인의 시와 나름의 감상문을 보내준 적이 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석사 시절 허 교수를 지도한 김영훈 서울대 교수도 "허 교수는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고 차분하게 자신을 믿고 길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라며 "내면의 힘이 강한 학생이었던 점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고 기억했다.
허 교수는 "제가 배우가 된 것처럼 (수첩 속) 그분들을 따라하다 보면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 비슷한 생각으로 말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며 "수십 명이 넘기 때문에 롤모델을 딱 한 분 꼽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오는 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13일에는 고등과학원에서 기자간담회와 수상기념강연을 한다. 매년 여름 그랬던 것처럼 올 여름도 고등과학원에서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계속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