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는 박모(80)씨는 지난 2015년 11월쯤 요실금·빈뇨·야간뇨 등 증상으로 서울의 한 대학교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 '방광 내시경 검사'를 받고 귀가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부터 고열과 오한, 의식 저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해당 병원 응급실에 다시 내원했고, 혈액검사에서 '감염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이는 결국 패혈증으로 진행됐다.
박씨 가족들은 '의료 사고'라고 보고 2017년 9월 해당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박씨 요도에 0.5cm 정도 패인 흔적이 발견된 점과 내시경 검사를 하며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의료진의 과실로 인해 최초 감염이 이뤄졌다는 입장이다. 반면 병원 측은 패혈증이 내시경으로 인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고, 기저질환으로 인한 가능성이 있다고 반박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소송이 제기된 지 4년 9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1심 결론조차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원에서 지금까지 여러 대학병원에 박씨의 신체 감정을 의뢰했는데, 전부 "진료 스케줄이 많다"며 거절해왔다. 결국 박씨 가족들이 직접 전국의 여러 병원을 수소문해가며 감정해 줄 곳을 찾아다녔다. 최근 경기도에 있는 한 병원의 재활의학과 의사가 개인적으로 박씨의 신체감정을 해주겠다고 나섰지만, 소속 병원 측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어서 무산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박씨의 몸은 패혈증으로 인해 점점 시커멓게 변해갔다. 발끝부터 허벅지, 배, 입, 귀 등의 피부가 순서대로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고, 손과 발에 괴사·마비 증상이 찾아왔다. 현재까지 세 차례 심정지를 겪었고, 식도 곰팡이균 증식과 양쪽 눈의 시력 소실 등도 나타났다. 손가락과 발가락 몇 군데는 이미 떨어져 나갔다. 박씨는 약 8년 동안 거동을 못하고 침대 생활만 하고 있으며, 70대 부인이 병수발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2.
2016년 2월 집 근처에 있는 ㄱ병원에서 당뇨 및 고혈압과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를 받아 온 김모(58)씨는 같은 해 10월 점심 식사를 한 후 갑자기 구토와 설사 증상이 나타나 ㄱ병원에 내원했다. ㄱ병원은 대장성 과민 증후군으로 진단하고 진경제·지사제를 처방해 줬지만 오히려 증상은 더욱 심해졌고, 김씨는 탈진 상태로 인근 다른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검사 결과 김씨는 탈수로 인한 급성 신부전증 및 산증으로 응급 투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더 큰 병원으로 전원 돼 응급투석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신장 기능이 절반 정도 손상된 상태였다고 한다. 김씨는 평생 투석을 받거나 신장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됐다.
김씨는 당뇨가 있는 상황에서 탈수를 겪고 있는 환자에게 복용시켜서는 안 될 약을 처방했다며 ㄱ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년 11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1심 판결이 나지 않고 있다. 병원 측은 정상적인 약 처방이었다며 의료 과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데, 의료 과실 여부를 판단해 줄 제3의 의료기관에서 번번이 진료기록에 대한 감정을 거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씨는 "사고 당시 52세 남자로서 의료 사고로 인한 만성신부전으로 70% 정도의 노동능력이 상실된 상태에 이르렀다"며 "일상생활로 복귀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병원에서 적극적 관리를 받고 있으며 육체적·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의료 사건' 1심 재판 26개월…'의료계 카르텔'에 피해자만 두 번 운다
의료 사고를 당해 병원 측과 소송을 진행 중인 이들이 의료 기관의 '감정 거부'로 수년간 재판이 지연되는 등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의료 사건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재판부도 감정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재판부가 감정을 요청하더라도 '가능 여부'를 회신 받기까지 1~2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가, 답변이 오더라도 "진료 스케줄 상 바빠서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혹여 감정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병원이 나타나더라도 그 결과가 오는 데는 최소 6개월이 걸린다.감정 결과가 나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원고(의료사고 피해자 측)가 요청해서 받아 낸 감정 결과에 대해 피고(병원 측)가 동의할 수 없다며 다른 기관에 의뢰하겠다고 주장하면 그 결과를 또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법원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당시 진료 행위가 적절했는가 여부를 보는 '진료기록감정'과 현재 환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신체감정', 두 가지가 필요한 실정이다.
실제 박씨의 경우 가족들이 소송 초기 '진료기록감정'을 한 병원으로부터 받아내면서 병원 측의 과실 정황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신체감정'이 수년간 이뤄지지 않으면서 소송이 지연됐다. 반대로 김씨의 경우 '신체감정'은 비교적 빨리 이뤄졌지만 '진료기록감정'은 계속 못 받고 있는 상황이다.
같은 의료계가 감정을 진행한다는 점도 문제다. 의료계가 좁은 데다가 통상 같은 진료과목을 전문의로 하는 이에게 감정 의뢰가 이뤄지다 보니까 '제 식구 감싸기'가 이뤄진다는 비판이다.
시민단체 의료소비자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가해자도 의사고, 이를 감정해 주는 사람들도 의사이니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며 "의료 사고 피해자 측과 병원 측의 주장은 서로 갈리는 게 당연한데, 이를 판단할 제3의 의료 기관에서 과실 여부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 줘야 하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공정하지 못한 감정 결과로 진실이 묻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승소 1% 안팎…"과실 입증 책임 '환자→의료진' 바꿔야"
이 같은 문제는 통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의료중재원에 따르면 의료 사고 피해자 측이 의료진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의 1심 판결 선고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26.3개월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마저도 피해자 측의 완전 승소율은 2016년 0.6%, 2017년 1.2%, 2018년 0.9%, 2019년 0.7%, 2020년 0.8%로 1% 안팎에 불과했다. 일부 승소율은 같은 기간 30% 안팎 수준으로 나타났지만, 과실 비율을 단 일부만 인정해도 해당 통계에 잡히기 때문에 실제 피해자 측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감정을 거절하는 의료진에 대해 처벌하도록 하는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신현호 변호사는 "현재도 감정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때는 법원이 해당 의료진에 50~100만원씩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부과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며 "'정당한 사유'에 대한 경우를 엄격하게 정해서 법원이 감정을 강제로 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경우 환자 측에 서서 감정을 해주는 곳이 있다. 결론은 의사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고 (감정의) 익명성이 보장되면 해결될 수 있다"며 "과거 건축사들이 건설사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감정을 못 하다가 이후 숫자가 늘어나면서 경쟁 관계가 되다 보니까 서로 견제·감시가 이뤄질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의료계도 구조적 해결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료 사고의 입증 책임 주체를 피해자에서 의료진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 사무총장은 "교통사고와 관련한 민사소송이 평균 6개월 걸리는 반면 의료 사고는 그보다 4배 이상 걸린다. 그 이유는 의사들의 잘못을 의사들이 평가하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의료진의 과실 여부를 피해자 측이 입증해야 하는데 이걸 전환해야 한다. 일단 의료 사고가 나면 의사의 과실을 전제로 하고, 잘못이 없다는 점을 입증했을 경우에만 책임을 면하도록 하는 등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의료진의 과실을 전제로 하게 되면 의료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의료진들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