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연수는 밥을 먹고, 청소하고, TV를 보고, 일하며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일상과 마음이 무너지는 커다란 사건이지만, 여전히 연수의 일상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아의 딸'은 피해자에게도 일상이 존재하며, 여전히 즐거워할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피해를 겪었다고 피해자로만 남을 게 아니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며 피해자들에게 다시 일상으로, 세상 속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손을 내민다. 이 모든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그려낸 연수 역의 배우 하윤경은 세상 모든 연수에게 "절대 혼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윤경은 연수를 납득되게 그려내고 싶었다
▷ 연수는 디지털 성범죄로 인해 고통받고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가려 애쓴다. 연기하면서 연수가 세상에 지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 느낀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연수에게는 너무 숨지는 않으려고 하는 지점이 있다. 사실 그렇지만 많이 숨었다. 너무 고민 많이 하고, 직업을 구할 때도, 온라인 강의할 때도 너무 조심스러워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포르노 사이트를 다 뒤지면서 자기 영상이 올라와 있나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너무 단단한 사람이라고 비춰지는 게 한편으로는 의문점이 들기도 했다.
단단한 사람이면서도 너무 많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가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끔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님도 그런 인물로 그렸다. 그래서 그런 밸런스를 잘 맞추려 했다. 너무 단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가는 게 납득되지 않을 거 같기도 했다.
▷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다. 그럼에도 우리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갖는 고정관념이 있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경아의 딸'처럼 피해자를 대상화하거나 전시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게 중요한 작업인 것 같다.
연수가 전 남자친구로부터 영상을 받은 동창에게 자세히 보니 나 아니더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내가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지 자세히 보니까 아니라는 말이 나올 수 없다. 그런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하는 마음이 어떨까,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올 때 마음은 어떨까 등의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하며 찍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안 되지만 또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잘 표현하려 했다.
그리고 혼자 집에서 청소한다든지, 예능을 본다든지 연수는 그냥 일상을 살아나간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모습, 그게 난 더 무섭고 슬프다고 생각한다. 사건이 벌어졌지만, 일상은 변하지 않고 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게 진짜 현실 공포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많이 보여주려고 했다. 그걸 너무 잘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요즘 너무 그런 게 너무 많이 나왔던 와중에 이 시나리오 받았는데, 나는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너무너무 와 닿았다고 해야 하나. 되게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떤 사건을 접하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한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안다. 나도 이 작품을 하려고 했던 이유가 마음이 갔고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겠는 거다. 물론 실제 피해자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이겠지만, 우리가 평소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를 다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꼭 작업하고 싶었다.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있었다.
▷ 영화를 촬영하면서나 끝나고 나서 마음을 다독이는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떤가?
다들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오히려 내가 힘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한다면, 나는 거기에 가닿을 수 없다. 오히려 난 이걸 표현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다. 그런 마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로해져도 '아휴, 이쯤이야!' 하면서 했다.
그리고 배역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역의 감정에 취한다고 해야 하나.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점을 경계했다. 자칫 기만이 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진심인 동시에 그 진심을 어떻게 잘 표현해야 할지가 너무 중요했다. 너무 스스로에게 진실만 강요하려 하지 않고 또 너무 표현적인 것에만 집중하려 하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추려 노력했다.
세상 모든 연수에게 손을 내밀자는 마음
▷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며, 피해자의 편에 서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하나의 개선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경아의 딸'은 피해자를 '피해자다움'에 가두지 않고 피해자에게도 역시 일상이 존재하며, 그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지지의 메시지를 보낸다.
정말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나는 그게 마지막 엄마가 연수의 노트북을 보는 장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연수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다. 자기 일을 잘 해내고 싶었던 사람이고, 사랑도 열심히 하던 사람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면서 그걸 보는 엄마가 많은 회한이 밀려오는 그 장면이 좋았다.
관객분들이나 다른 모든 분이 '왜 찍었어?' '조심하지' 등의 마음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조금씩 갖고 있을 거다. 영화가 시작할 때도 안타까운 마음에 찍지 말지 생각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연수는 그냥 자기 삶을 살았던 것뿐인데 갑자기 돌을 맞은 거다.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마음에 대한 반성이 느껴지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꿈을 가진, 앞날이 창창한 사람에게 벌어진 그 사건이 모녀에게 큰 상처였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주는 장면이다.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피해자라면)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할 거 같다. 찍으면서 느낀 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누가 위로해도 위안이 쉽게 다가오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피해자분들보다 가족이나 동료, 친구들에게 더 많은 말을 하고 싶다.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말이다.
연수도 영화 속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작은 손길들로 인해 연수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본다. 물론 가장 첫 번째로는 불법 촬영 영상물을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피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사건의 피해자인 동시에 경아의 딸인 세상의 모든 연수에게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