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과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의 거취를 두고 다시 신구(新舊)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돼 아직까지도 임기가 1년가량 남았지만, 새 정부가 집권한 만큼 자진해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여권에서 나오고 있다.
전현희 위원장은 2020년 6월 권익위원장에 임명됐다. 전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재선 의원 출신으로, 민주당에서는 불모지로 꼽히는 서울 강남에서 당선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상혁 위원장은 법조인 출신으로, 2019년 9월에 임명됐다. 그는 정당에 몸을 담은 적은 없으나, 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를 지낸 경력 등 때문에 진보 성향으로 평가 받는다.
권익위원장과 방통위원장은 장관급 공직으로, 임기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자리다. 각각 임기는 3년이고,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전 위원장과 한 위원장 모두 임기가 1년가량 남았다.
법적으로 임기를 보장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더라도 물리적으로 이들을 교체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정치 공방이 거세지는 상황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용산 대통령실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두 위원장과 관련해 "임기가 있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 아니겠나"라면서도 "국무회의에 국무위원도 아닌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으면 다른 국무위원들이 마음에 있는 얘기를 툭 터놓고 (할 수 있겠냐)"라고 말했다.
이어 "굳이 올 필요 없는 사람까지 다 배석시켜서 국무회의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은 있다"면서 두 위원장의 국무회의 배석에 불편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권익위원장과 방통위원장은 국무위원은 아니지만, 장관급 인사인 만큼 관례상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국무회의에 배석한다. 다만, 전 위원장과 한 위원장은 정권이 바뀐 이후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 참석한 적은 없다. 국무총리 주재 국무회의에는 각각 2번 배석했다고 한다.
전 위원장은 윤 대통령 발언 다음날 바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의 정신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법률에 정해진 공직자의 임기를 두고 거친 말이 오가고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드리는 상황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종종 언급하는 '법치'를 곁들여 자진 사퇴설을 일축한 셈이다.
국회에서도 여야 간 설전이 오갔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됐다고 하더라도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후안무치한 것이고, 자리욕심 밖에 안 되는 것으로 비춰질 뿐이라고 본다"고 두 위원장을 직격했다.
반면 민주당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윤석열 정부는) 본인들도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임기제 공무원을 '알박기'라고 비판하거나 그만둘 것을 종용하고 있지 않나"라며 "이것도 블랙리스트 사건인가"라고 지적했다.
인사 문제로 신구 갈등이 격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 3월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한국은행 총재와 감사위원 인선을 두고 갈등이 격화된 적이 있다. 또 지난 16일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2020년 9월 있었던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월북을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혀, 문재인 정부에서 '월북으로 추정한다'고 했던 입장을 뒤집으면서 신구 갈등이 고조됐다.
대통령제와 임기제 공무원 엇박자…'제도개선' 정치권 공감대
애초 이런 갈등은 우리나라가 대통령제를 택하면서 동시에 일부 고위 공직자에 '임기 공무원제'를 적용하면서 기인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제를 택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고위 공직자의 경우 엽관제(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정당이 관직을 지배하는 정치적 관행) 성격을 갖는다. 집권한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장관 등을 임명해 새로운 철학과 방향을 국정운영에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익위원장이나 방통위원장의 경우, 업무 특성상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임기를 두고 있다. 정파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취지다.
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는 전 위원장 임명에 대해 "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고, 한 위원장 인선에 대해서는 "국정과제를 흔들림없이 추진해나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 수행 적임자'들이 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제도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한성민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양측 모두 일리 있는 얘기다. 대통령의 임기와 해당 기관장의 임기가 맞지 않아 생기는 문제"라며 "개인적으로 대통령제에서는 엽관제 문화를 받아들이는 정치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각 제도마다 저마다의 취지와 논리가 있기 때문에 여야는 표면적으로 물러섬이 없지만, 물밑에서는 제도 개선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결국에 국민께 어떤 제도가 더 이득이 되는지를 살펴서 제도 개선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국회에서 잘 논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우상호 비대위원장도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나 "정권 교체 때 임기제 공무원의 임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제도 개선의 문제"라며 "예견된 부조화, 비합리적인 것은 여야가 합의할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