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서로 다른 장면인데 어디에선가 경험해본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지는 일이다. 데자뷰라고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권의 도덕성과 신뢰를 엄청 까먹은 2019년 '조국 사태'를 힘겹게 지난 뒤 다음해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국 전 법무장관에 대해 "지금까지 겪었던 고초만으로도 아주 크게 마음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마음의 빚'이라는 말은 그렇게 나왔다. 그러나 그 '빚'은 조국 전 장관에게 진 것이 아니라 지지층과 나아가 국민들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문재인 정부의 부채가 되고 말았다.
조국 전 장관의 임무였던 검찰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법체계의 형해화만 남겼으며 현직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탄생의 씨앗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인 지난 2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동훈 현 법무장관에 대해 "거의 독립운동처럼 해온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한동훈 장관이 독립투사가 된 순간이다.
문재인의 "마음의 빚"과 윤석열의 "독립운동"은 다른 사람, 다른 정권에서 나온 말이지만 어딘지 익숙하다. 서로 기시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사들을 매우 싫어해서인지 법무장관에 한번도 검찰 출신을 임명하지 않았다.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검찰을 압박해 검사들을 최대 비토 세력으로 만들었다.
법무부 요직은 물론 청와대 비서관에도 검찰 출신을 거의 쓰지 않았다.
대신에 판사 출신이나 민변 출신 변호사들을 등용했다. 2017년 청와대 비서실 소속 비서관 31명 중에 절반이 넘는 17명이 민변과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출신이었다. '민변공화국'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에 완전히 역주행하고 있다. 그 시작은 '독립투사' 한동훈의 법무장관 임명으로부터 시작됐다.
한동훈 장관은 임명되자마자 검찰수사권 조정으로 내상을 입은 검찰의 수사권 회복을 위해 조직과 법령을 개정하는 등 검수완박 되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가하면, 인사정보관리단을 만들어 과거 청와대 민성수석실이 했던 공직자 인사검증 업무까지 주도한다.
이쯤되면 법무검찰총장 또는 법무민정수석이라고 불릴만 하다.
청와대 비서관과 장차관중에 검찰 출신은 13명이나 된다. 오래 전 검찰을 떠난 권영세 통일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까지 포함하면 검사출신이 15명인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눈에 검찰 출신이 가장 정의롭고 능력있는 직군일지 몰라도 검찰공화국, 아가패 정권(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패밀리)이라는 정치적 주홍글씨를 스스로 새겼다.
오죽하면 윤핵관이 아니라 윤핵검(윤석열측 핵심 검사), 카풀검사 출세 시대라는 말이 나올까.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검사사랑 소신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적재적소"라는 윤 대통령의 말은 그나마 인사권자의 위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엔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나?"라는 8일 반박은 문재인 정부의 나쁜철학을 긍정한다는 뜻으로 오역될 수 있다.
측근인 권성동 국민의 힘 원내대표가 적절한 언론플레이로 제동을 걸어봤지만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이 필요하면) 또 쓰겠다"는 말로 부인했다.
특정 직군이 정부 요직을 독점하는 것은 좁은 인재풀의 문제를 넘어 대통령의 인사철학 결핍을 반증하는 것이다. 민변공화국이라는 말처럼 검찰공화국이라는 말도 인사정책 실패의 상징일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 전국의 검찰조직과 검사들은 윤 총장의 대선 선거운동 조직과 선거운동원처럼 화답했다.
그들이 비록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대가가 국정지배라면 검찰공화국이라는 비난을 반박할 수 없다.
최측근인 한동훈 장관은 소통령으로서 문재인 정부 시절 당했던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한씨의 해방일지'를 마음껏 써내려가고 있다.
절대권력은 절대 패망한다. 대한민국은 권불십년의 반 밖에 안되는 권불오년의 나라다.
문재인의 "마음의 빚"이 부도덕과 몰락의 불감증을 상징하는 언어가 됐듯이 윤석열의 "독립운동"에 대한 특별포상은 몰염치와 패망의 길로 이어질 수 있다.
문재인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은 윤석열의 데자뷰, 5년마다 반복되는 이런 기시감을 국민들에게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