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나노'서 역전 노리는 삼성…이재용이 ASML 찾는 이유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출국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2년 만에 유럽 출장길에 오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슈퍼을'(乙)인 네덜란드의 ASML을 찾는다.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서 대만의 TSMC를 따라잡으려는 삼성전자에 있어 EUV는 기술 격차를 좁히는 핵심 장비로 꼽힌다.

9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관계자가 탑승한 대한항공 전세기는 지난 7일 오후 12시 김포공항을 출발해 현지시간 같은날 오후 5시쯤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 부회장은 육로를 통해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회장은 우선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업체 ASML 본사를 찾아 EUV 노광장비 수급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ASML은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글로벌 업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이 2020년 10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앞서 이 부회장은 2년 전인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2016년 11월에도 삼성전자를 방문한 ASML 경영진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바 있으며, 2019년 2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오는 18일까지로 예정된 이 부회장의 유럽 출장에서 대외적으로 공개된 행선지는 네덜란드가 유일하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반도체 구현을 위해 EUV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20년 전부터 ASML과 협력해 왔으며, 전략적 지분 투자를 통해 올해 1분기 기준 5조 1900억 원 상당의 이 회사 지분 1.5%를 보유하고 있다.

EUV 노광 기술은 극자외선 광원을 사용해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술로, 기존 기술보다 세밀한 회로 구현이 가능해 인공지능(AI)·5세대(5G) 이동통신·자율주행 등에 필요한 최첨단 고성능·저전력·초소형 반도체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기술이다.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개념도. ASML 제공

반도체 칩을 생산할 때 지름 30cm의 '웨이퍼'라는 실리콘 기반의 원판, 즉 둥근 디스크는 감광물질로 코팅이 되고, 스캐너라고 하는 포토공정 설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설비 안에서 회로 패턴을 새겨 넣기 위해 레이저 광원을 웨이퍼에 투사하는 노광 작업을 진행한다.

노광 단계를 거쳐 반도체 칩 안에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 정도로 작고 미세한 회로소자 수십억 개를 형성하게 된다. EUV 공정은 이런 노광 단계를 극자외선 파장을 가진 광원을 활용해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EUV 광원은 기존 불화아르곤(ArF) 광원보다 파장이 훨씬 짧기 때문에 더 미세하고 오밀조밀하게 패턴을 새길 수 있다. 또 공정 단계를 줄일 수 있어 성능과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의 비율)이 향상되고 제품 출시 기간을 단축하는 등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업계 최초로 EUV 공정을 적용한 7나노 시스템온칩(SoC) 제품을 출하한 데 이어 그해 하반기부터는 6나노 제품 양산을 시작했다. 시스템반도체에 이어 메모리 업계 최초로 EUV 공정을 적용한 D램을 양산하는 등 EUV의 활용 범위를 확대해 가고 있다.

문제는 ASML이 독점 생산하는 EUV 노광장비의 양이 한정돼 있다 보니 이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점이다. 장비 생산업체인 ASML이 반도체 업계의 '슈퍼乙'로 통할 정도다. 한대에 2천억~3천억 원에 달하는 이 장비는 연간 50대 안팎 정도만 생산된다.

증권가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ASML의 EUV 장비 출하량은 48대로, 대만의 TSMC가 22대, 삼성전자가 15대를 차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예상 장비 출하량은 51대로, TSMC와 삼성전자가 각각 18대와 22대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올해 초 인텔은 2025년부터 적용할 인텔 1.8나노 공정을 위해 ASML의 차세대 EUV 노광장비 '하이 뉴메리컬어퍼처(High NA) EUV'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 후발주자인 인텔이 가장 먼저 최신 장비를 도입한 것이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제공

TSMC 추격을 위해 잇따라 생산시설을 늘리고 있는 삼성전자는 EUV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경기 평택캠퍼스의 세번째 반도체 생산라인 'P3' 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 네번째 생산라인 'P4'도 착공했고,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는 파운드리 2공장을 조만간 착공한다.  

삼성전자는 EUV를 활용해 독자적인 신기술인 GAA(Gate-All-Around) 기반의 3나노 반도체 양산을 올해 상반기에 시작할 예정이다. 반면 TSMC는 기존 미세공정에 쓰이던 핀펫(FinFET) 공정을 그대로 적용한다. 업계에서는 양사가 서로 다른 방식을 적용하는 만큼 3나노 양산이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TSMC는 3나노 수율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TSMC에 우호적인 대만의 정보기술(IT) 매체인 디지타임스는 올해 초 "TSMC가 3나노 공정에서 기술 로드맵을 지속적으로 수정했지만 수율 등 전반적인 성능 개선 진도가 여전히 예상보다 낮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온다"고 전했다.

애플의 'M2' 칩은 2세대 5나노미터 기술을 사용해 제작된다. 애플 제공

실제로 TSMC는 최대 고객사 중의 하나인 애플이 신형 '맥북' 등에 탑재할 'M2' 프로세서를 당초 예상과 달리 3나노가 아닌 5나노 공정으로 생산하기로 했다. TSMC의 3나노 반도체 양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관측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다만 삼성의 신기술이 오히려 고객사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반도체 전문매체인 이이타임즈(EETimes)는 지난 6일 "삼성이 업계 최초로 '나노시트'를 상용화했지만 퀄컴과 엔비디아 등 고객사는 실행 단계의 위험을 우려해 TSMC로 발길을 돌렸다"는 투자기관 번스타인의 의견을 전했다.

TSMC는 2025년 양산을 시작하는 차세대 2나노 반도체 공정부터 새 '나노시트' 기술을 도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보다 3년 앞선 올해 상반기부터 나노시트 기반의 GAA 공정을 적용한 3나노 반도체 양산에 들어간다. 기술력 차이를 단숨에 좁히려는 승부수인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EUV를 활용한 3나노 반도체 양산에서 TSMC보다 앞서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반도체 생산 장비의 안정적인 확보가 생산 능력 확대로 이어지는 만큼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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