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3년 9개월만에 다시 5%대에 진입하면서 경기가 침체됨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오르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현실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위기 후 14년만에 다시 찾아온 5%대 물가상승률
통계청이 3일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5월 대비 5.4% 상승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5.4%는 글로벌금융위기 때인 2008년 8월의 5.6% 이후 13년 9개월만에 기록한 최고치다.
물가상승률 5.4%는 수치가 높은 것 자체도 중요한 사안이지만, 그 상승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도 우려의 지점이다.
지난해 10월 3%대에 진입한 후 5개월만인 올해 3월에 4%대로 올라섰는데, 5%대 진입까지는 불과 2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가관련 내각 구성 미완성에도 '민생대책' 내며 적극 대응 나선 정부
이같은 가파른 상승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정부는 새 정부 출범 2개월여 만인 지난달 30일 '서민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를 내놨다.
민생 여건 개선을 주제로 했지만, 사실상 물가 대응책인 이 대책은 수입품, 식료품, 식재료 등의 물가 상승 억제에 방점을 뒀다.
식용유와 돼지고기, 밀과 밀가루 등 식품원료 7종에 대한 관세를 연말까지 0%로 낮추는 할단관세를 추가 적용하는 한편, 커피와 코코아 원두에 대한 수입 부가가치세도 2023년까지 한시 면제했다.
외식물가 상승의 요인이 되고 있는 밀가루 가격에 대해서는 상승분의 70%를 정부가 지원하고, 제분업계가 20%를 부담하도록 해 인상 요인을 최소화했고, 병·캔 등 개별포장된 가공식료품 부가가치세도 2023년까지 면제했다.
직접적인 물가 억제책은 아니지만 교통·물류업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경유 유가연동보조금의 지급 기준을 리터당 1850원에서 리터당 1750원으로 낮춰 리터당 50원만큼의 기름 값을 아낄 수 있도록 했다.
기획재정부는 물가 상황을 모니터링하면서 현재 수준보다 물가가 더 가파르게 상승할 경우 품목별로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설 방침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아직 물가와 관련한 관계부처 내각 인선이 다 마무리도 되지 않은 시점임에도 민생대책을 발표했다"며 "대내·외 여건 상 구조적으로 물가가 오르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적극적인 움직임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대내·외 물가상승 요인 여전…추경호 부총리 마저 "끌어내릴 방법 없다" 토로
하지만 이같은 정부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전망은 밝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곡물과 원유 등 수입품목 가격은 고공비행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망가진 글로벌 공급망 또한 회복이 더딘 상황이다.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그동안의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서비스 가격을 상향 조정하고 있다.
여기에 대규모로 편성된 윤석열 정부 첫 추가경정예산으로 인한 코로나손실보전금이 지난달 지급되기 시작한 것도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생활고 지속을 근거로 한 노동계의 임금인상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데, 물가 상승을 이유로 임금이 인상되면 다시 물가를 자극하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1일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릴 방법이 없다"며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과도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사태 등이 촉발한 원자재 가격 상승 문제가 있다. 당분간 5%대 물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는 뛰는데 산업은 침체…전문가들 "장기침체 우려…6%대 물가상승률도 이상하지 않아"
지난달 31일 발표된 통계청의 4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생산과 소비, 투자가 모두 하락하는 이른바 '트리플 감소'가 나타났다.
특히 투자가 전달 대비 7.5%나 하락하면서 한국 경제가 경기는 침체되는데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문턱에 섰다거나, 이미 진입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화에서 "비용 충격에 의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사실상 진행 중이면서 물가 쪽 압력이 상당히 높아져 있다"며 "기존 코로나19 상황에서 풀려나갔던 유동성과 에너지 가격을 비롯한 해외에서의 비용충격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재 물가 상승국면을 빠르게 돌파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은 쉽지 않다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대외 요인에 변화가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고,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미래 상황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아지면서 투자를 이끌어낼 유인 또한 적다는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물가 상승은 금리인상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어떻게 보면 관세를 낮추는 등의 소비 정책은 물가를 더 오르게 한다"며 "코로나19가 오기 전에도 경제성장률이 2%였는데 올해 성장률이 2%초반에서 1% 중후반까지 떨어진다면 사실상 3년 동안의 장기 침체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산업구조조정을 통한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를 시행하더라도 3~4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며, 단기에 효과를 낼 수 있는 경기 부흥책 또한 마련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히려 최근 물가 상승세, 주요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물가 상승률이 5%대를 넘어서 6%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성 교수는 "물가가 현재 속도로 상승한다면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주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이라며 "미국은 워낙 물가가 올랐고, 우리 역시 상당히 추가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