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5년간 반도체, 바이오, 신성장 IT(정보통신) 등 신사업을 중심으로 450조원을 중점 투자해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을 주도하겠다는 '역동적 혁신성장을 위한 삼성의 미래 준비' 발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팹리스(설계 전문) 시스템반도체였습니다.
명실공히 30년 동안 '초격차'를 유지해온 메모리반도체 부문의 최강자이자, 대만의 TSMC와 함께 세계에서 '유이'하게 초미세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추격자인 삼성전자에 있어 팹리스 부문은 '아픈 손가락'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은 3년 전 오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서도 1위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발표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산업을 읽는 인더독 시리즈, 이번에는 전자기기의 '두뇌'를 만드는 팹리스 시스템반도체와 삼성전자의 도전에 대해 알아 봅니다.
팹리스·파운드리·IDM…기억하는 메모리반도체·연산하는 시스템반도체
반도체는 크게 정보를 기억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를 연산·제어·처리하는 시스템반도체로 나뉩니다. 인간의 눈·코·귀·피부처럼 데이터를 센싱하고 두뇌처럼 분석·처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시스템반도체는 8천여종의 제품으로 구성되며 용도와 수요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습니다.팹리스가 설계한 시스템반도체는 파운드리가 대신 만듭니다. 50% 점유율의 TSMC와 그 뒤를 쫓는 삼성전자가 있습니다. 사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와 생산, 판매까지 모두 수행하는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종합반도체회사)이기도 합니다.
메모리반도체 절대 강자 삼성이 시스템반도체 1위를 노리는 이유
삼성전자는 1983년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10년 만인 1992년 일본 기업을 제치고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1위를 달성했습니다. 2002년부터는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1위에 올랐고 30년 동안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압도적인 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삼성전자 반도체 매출에서 메모리반도체의 비중은 70% 이상에 달해 업황에 따라 실적이 좌우되는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의 전체 반도체 매출 26조9천억원 중 메모리반도체 매출은 74.8%(약 21조원) 규모였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부문에서 94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미국의 인텔을 제치고 2018년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반도체 매출 세계 1위를 달성했습니다. 작년과 2018년은 전 세계적으로 메모리반도체가 호황을 맞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불황에 처하면 실적은 부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업황 변동성이 커 가격 상승과 하락이 주기적으로 반복됩니다. 메모리반도체 슈퍼 호황기였던 2018년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은 58조9천억원으로 역대 최대였지만 이듬해 영업이익은 27조8천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메모리 1위'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3% 수준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은 19.9%의 점유율로 49.8%의 미국에 이은 2위를 차지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분전한 메모리반도체 부문의 세계 시장의 점유율은 59.1%에 달했습니다.IC인사이츠의 2020년 시장 분석에서도 한국은 본사 소재지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에서는 21%로, 역시 미국(55%) 다음으로 2위에 올랐습니다. 팹리스 한정 점유율은 고작 1%였습니다. 미국은 64%로 압도적 1위였고, 미디어텍을 끼고 있는 대만 18%, 중국이 15%였습니다.
D램과 플래시메모리로 대표되는 메모리반도체 부문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약 30%를 차지합니다.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 이미지센서 등으로 구성된 시스템반도체는 그 두배에 가까운 50~60%가량을 점유합니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의 집계를 보면 지난해 전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 규모는 4021억달러(약 506조원), 메모리반도체는 1538억달러(약 194조원) 수준이었습니다. 옴디아에 따르면 오는 2025년 시장 규모는 팹리스 시스템반도체가 4773억달러, 메모리반도체 2205억달러가량으로 전망됩니다.
차량용 반도체·이미지센서 시장서 존재감 높이는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부문은 4차 산업혁명을 맞아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보통 스마트폰 한 대에는 약 40개의 반도체가 들어가고 노트북은 약 100개, 자동차에는 300개가량의 반도체가 탑재됩니다. 자동차 산업이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부족 현상의 직격탄을 맞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삼성전자는 지난해 통신칩, 프로세서, 전력관리칩 등 3종의 시스템반도체를 공개하며 첨단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적극 가세했습니다. 삼성전자는 독일 아우디에 차량용 프로세서를 공급해왔으며, 테슬라 전기차에 장착될 고성능 자율주행 칩 생산도 맡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삼성은 이미지센서 시장에서도 점차 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지센서는 카메라를 통해 들어온 빛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시스템반도체입니다.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노트북과 자동차 등 카메라가 달린 모든 전자기기에 이미지센서가 들어갑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메모리 반도체 설계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업계 최초로 1억8백만 화소 이미지센서를 출시했고, 2년 만인 지난해에는 업계 최초로 '2억 화소'의 벽을 뛰어넘은 모바일 이미지센서와 업계 최소 크기의 듀얼 픽셀(Dual Pixel) 이미지센서를 공개했습니다.
삼성전자는 26일 자사 뉴스룸에 2억 화소 아이소셀 이미지센서로 만든 초대형 고양이 인쇄물 제작기를 올렸습니다. 2억 화소 이미지센서로 촬영한 고양이 사진을 가로 28m에 세로 22m, 농구 코트의 약 1.5배인 총 616㎡ 넓이의 천에 출력하며 한계를 시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5G 모뎀(통신칩)을 업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 초고속통신 반도체 부문에서도 '1등', '최초'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주요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사업 중 이미지센서 등은 1 등 업체들과의 시장 격차는 크지만 투자와 R&D(연구개발)를 통해 '기술 격차'를 줄이며 성장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자평했습니다.
'엑시노스' 부진 딛고 2025년까지 첫 갤럭시 전용 AP 개발 추진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 시장에서도 '역전'을 노립니다. 삼성전자의 모바일 AP인 '엑시노스'는 한때 시장의 절대 강자 퀄컴의 스냅드래곤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AP가 메모리·CPU·GPU 등이 하나의 칩에 담기는 SoC(시스템온칩) 형태로 바뀌면서 고전했습니다.삼성전자는 올해 초 새 플래그십 스마트폰인 갤럭시 S22 시리즈를 출시할 때도 전작보다 '엑시노스 2200'의 적용을 늘리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엑시노스 탑재율은 2018년 48%에서 매년 감소해 지난해에는 28%까지 낮아졌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스마트폰 AP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엑시노스는 점유율 6.6%로 4위에 그쳤습니다. 삼성전자의 AP 시장 점유율은 2018년 12%에서 2019년 9.7%, 2020년 8.7%로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삼성은 '미래 준비' 발표에서 △고성능·저전력 AP △5G·6G 통신모뎀 등 초고속통신 반도체 △고화질 이미지센서 등 4차 산업혁명 구현에 필수불가결한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및 센서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국내에 신성장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관련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시스템반도체 1등 도약은 팹리스, 디자인 하우스, 패키징, 테스트 등 전체 생태계의 동반성장을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고 회사는 설명했습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부문에서도 독자적인 신기술인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술을 적용해 3나노미터(㎚, 10억분의 1m) 이하 제품을 경쟁사인 TSMC보다 빠른, 올 상반기 안에 양산하는 등 선단공정 중심의 기술개발과 투자를 통해 미래시장을 개척할 방침입니다.
기존에 없던 차별화된 차세대 생산 기술인 GAA 공정의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의 비율) 확보는 TSMC와의 기술 격차를 단숨에 좁히는 승부수가 될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450조 투자 계획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앞만 보고 목숨 걸고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성은 한국 대표 기업으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로 대규모 전략적 투자에 나섰으며 사회 전반에 역동성을 불어넣음으로써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