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수 논란 지만원, 대질신문엔 벌벌 떨며 들어오더라" [한판승부]

내가 북한의 최룡해? 참 허망한 이야기
5.18 北 개입없다 두 번 발표했는데..왜 안 믿나
5.18 현장, 목 졸린 시신 목 없는 시신 많이 목격
3개월 만에 본 내 얼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되면 경찰 서장 약속받았냐고 고문
5.18 관련자들, 지금도 엄청난 트라우마 견디며 지내
윤석열, 5.18 헌법에 넣는다더니…실망

▶ 알립니다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박재홍> 지난 2013년 극우논객 지만원 씨가 자신이 1980년 5월 광주에 파견된 북한군 특수부대였다라는 탈북자를 내세우면서 한동안 우리 사회는 5.18 북한 개입설이라는 이름으로 소모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죠. 이런 북한군 개입설은 군사정권의 유혈진압을 또한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기도 했는데요. 그동안 지만원 씨가 광주에 파견된 북한군 특수군 광수라고 제시한 사진 속 인물이라는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거짓이다라는 사실이 속속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만원 씨가 광수 36번으로 지목했던 양동남 씨를 연결을 해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시 5.18광주시민군에 참여했던 분들의 현재와 앞으로 남은 과제는 무엇일지 짚어보겠습니다. 지금 광주 CBS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선생님 나와계시죠?

◆ 양동남> 네.

◇ 박재홍> 반갑습니다. 우리 진중권 작가님과 김성회 소장님 인사 나눠주실까요.

◆ 진중권> 안녕하십니까?

◆ 김성회> 안녕하세요.

◆ 양동남> 반갑습니다.

◇ 박재홍> 일단 선생님이 한동안 광수 36번으로 지목되셔서 굉장히 어려운 삶을 사셨을 것 같습니다. 이 광수 36번이 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인 최룡해로도 지목되셨었는데 선생님, 이 사실을 언제 아셨습니까?

◆ 양동남> 2016년도요. 이제 지만원 씨가 발간했던 책자가 있습니다, 사진 책자가. 그 사진 책자를 봐주라고 해서 그 보는 과정에 제 얼굴이 나와 있길래 이런 일에 괜히 휩쓸리기 싫다라고 생각해 최대한 이야기를 안 했었어요.

◇ 박재홍> 그러니까 잘못된 걸 안 했음에도 그냥 본인임을 밝히기가 꺼려지셨었다? 그러셨군요. 그건 왜곡된 사실인데 처음 그 사실을 보셨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 양동남> 참 허망한 이야기죠.

◇ 박재홍> 허망하다.

◆ 양동남> 제가 만약 북한의 최룡해라면 내가 광주에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 박재홍> 또 무엇보다 이 광주시민군으로 참여하셨던 분이었는데 그러한 북한군이라는 거짓. 그런 사실이 뒤집어씌워진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셨을 것 같아요.

◆ 양동남> 상당히 불쾌했죠.

◇ 박재홍> 저희 인터넷으로 한번 사진 자료가 있는데요. 지금 저 사진을 근거로 이제 당시 광수 36번이 북한의 최룡해 위원장이다라고 주장을 했었던 것인데 사진으로 봐도 전혀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 양동남> 명지대 교수님이 지만원 씨가 저하고 최룡해라고 해서 사진 판독을 한 게 있어요. 전혀 맞지 않는 사진이고요.

◇ 박재홍> 지만원 씨 주장이 허위라는 사실은 말씀하신 대로 명지대 교수님, 그런 과정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겁니까?

◆ 양동남> 그렇죠.

◇ 박재홍> 그렇군요. 최근에 또 광수 1호, 일명 김군이라고 불렀던 인물도 확인이 됐죠? 선생님도 그 사실 들으셨습니까?

◆ 양동남>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기자회견한 내용이 나와 있었고 그걸 봤습니다.

◇ 박재홍> 그 사실 들으시니까 어떠셨어요? 본인 것도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었는데 광수 1호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좀 다른 사실이었기 때문에.

◆ 양동남> 그러니까요. 광수라고 지목을 했던 부분들이 지만원 씨가 우리들 80년 당시 찍혔던 사진들 가지고 전부 다 광수로 표기를 했잖아요. 그랬는데 지금 과정에 2015년부터 저희들이 지만원 씨가 광수 문제로 재판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아직도?

◆ 양동남> 당사자들인 우리가 직접 이렇게 살아 있는데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부대다라고 올린 것에 대한 그런 걸 계속 올린 것에 대한 대법원에 아마 계류 중일 것입니다.

◇ 박재홍> 대법까지는 아직 끝이 난 사건은 아니군요, 그러면.

◆ 양동남> 그렇죠.

◆ 진중권> 조갑재 씨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도 북한군 설은 정말 터무니없는 설이다라고 보수에서도 얘기를 했었는데 보수에서 일각 지만원 씨, 이분 저랑도 악연이 있거든요. 이분이 고소를 해서 물론 무죄를 받았습니다마는 계속 소송전을 했었는데. 어쨌든 이런 분들을 좀 만나는 보셨습니까? 도대체 어떤 분들입니까, 이런 분들은?

◆ 양동남> 서울중앙지검에서 재판 과정에서 같이 봤습니다.

◇ 박재홍> 그러세요?

◆ 진중권> 뭐라고 합니까, 그 사람들은 도대체?

◆ 양동남> 좀 저희들이 이제 불려나가서 같이 지만원 씨하고 대질할 때 들어오면서부터 벌벌벌 떨고 들어오시더라고요.

◇ 박재홍> 지만원 씨가? 왜 떨었을까요?

◆ 양동남> 모르죠. 참 측은한 느낌이 들 정도로 덜덜덜 떨면서 말도 더듬으면서 그러고 말을 하고 있고.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군 장교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 진중권> 어떻습니까, 재판도 걸리고 그랬는데 일부 판결도 나오고. 그런다고 어떻습니까? 과거에는 인터넷에 이게 굉장히 많이 떠돌았거든요. 저도 그 사진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인터넷에서. 요즘도 그렇게 많이들 퍼뜨리고 다닙니까?

◆ 양동남> 지금도 유튜브에서는 그렇게 많이 돌고 있습니다.

◆ 진중권> 유튜브로 갔군요, 그게.

◇ 박재홍> 그러면 이게 대법까지 판결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가 바라는 것은 이러한 5.18 북한군 침투설이 사라져야 한다라는 많은 공감대가 있는데 선생님 또 직접 재판에 가보시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만나보시고 판단하셨을 때 이게 사라질 수 있을까요?

◆ 양동남> 저희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당시 전두환 정권부터 해서 노태우, 김영삼 정부까지 당시 국방장관을 지냈던 사람들이 5.18 때 북한군 개입이 전혀 없었다라고 다 발표를 했잖아요, 2번이나. 그런데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왜 그러는가를 도저히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 박재홍>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일까요?

◆ 양동남> 그렇죠. 저희들은 왜곡된 정보가 너무 빨리 번지고 그런 것에 참 안타까움을 갖고 있습니다.


◆ 김성회> 80년 5월 얘기로 돌아가서 말씀 여쭤보고 싶은데요. 그 당시에 시민군에 합류를 어떻게 하시게 됐는지 또 제가 궁금한 건 그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었는지도 좀 궁금하거든요.

◆ 양동남> 그때 당시 20살이었습니다.

◇ 박재홍> 20살?

◆ 진중권>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습니까? 뭘 보시고?

◆ 양동남> 광주 시내에서 시위대,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고요. 저희들이 있었던 곳이 광주 보면 국군통합병원이라고 있습니다. 그 앞이 있는데 저 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길래 거기를 무슨 일인가 하고 내려가봤죠.

◆ 김성회> 안 무서우셨어요, 그때 거기로 걸어가시는 자체가?

◆ 양동남> 아니, 그때는 계엄군들이 안 보였으니까요, 거기는. 그래서 검은 연기 피는 곳을 가봤더니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타이어를 태우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시위대 차량들이 공수부대들이 광주시민 다 죽인다라고 도청으로 가자고 그런 소리가 나길래 저희들도 차를 타게 됐죠.

◇ 박재홍> 도청으로 가자, 도청으로 가자 이 말씀을 듣고 차를 타고 도청으로 가셨는데.

◆ 양동남> 그날도 계엄군과 투숙전 한번 이렇게 벌이고 들어갔다가 22일날 다시 나오게 됩니다, 도청 금남로로. 지금 보면 광주 금남로에 보면 5. 18기록관이라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저희들이 처음에 보는 게 뭐였냐 하면 PD님들도 아마 우리 5. 18 사진을 많이 접했으리라고 봅니다. 그 사진에 보면 리어카에 시신 2구가 실려 있는 게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목격을 하고.

◇ 박재홍> 선생님께서요?

◆ 양동남> 네.

◆ 김성회> 같이 가신 친구분들도 계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

◆ 양동남> 네. 그 시신을 보고 이래서 안 되겠다.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벌어질 수도 있고 우리 가족들한테도 벌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가담을 하게 되죠.

◆ 김성회> 그럼 보통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 싶으면 집에 가서 숨는 것이 맞는 거 아닌가요?

◆ 양동남> 그럴 때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당시 친구 하나가 학생운동군에 있던 친구를 금남로에서 만나게 돼요. 그래서 우리도 계엄군하고 대척을 하려면 총기가 있어야겠다라는 그런 소문들이 막 돕니다, 그날부터서. 21일날 화순으로 가서 화순경찰서 무기고를 털게 되죠.

◆ 진중권> 직접 가셨습니까?

◆ 김성회> 선생님, 그 당시에는 군대를 다녀오시지 않았을 때인가요?

◆ 양동남> 신체검사를 받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김성회> 그러면 실제 사격을 해 보신 적은 없는 상태에서 어쨌든 시민들을 지켜야 되겠다 생각하고 총기를 가져오신 것으로 봐야겠네요.

◆ 양동남> 지만원 씨도 그 이야기를 물어보는 거예요. 총 쏘는 것을 어디서 배웠냐. 이제 제가 대답하기를 제가 6.25전쟁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따지지 않고 많이 봤었습니다. 6.25전쟁 영화를 보면 칼빈과 M1 그 총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토대로 해서 배웠던 게 총 쏘는 방법은 그걸로 터득을 했고요.

◆ 진중권> 기동타격대에 들어가신 거고 도청으로 결국 들어가시게 되지 않습니까?

◆ 양동남> 그렇죠.

5·18 당시 광주 전일빌딩 인근을 비행하는 군 헬기 모습. 2018.5.20 [5·18기념재단 제공=연합뉴스] photo@yna.co.kr 연합뉴스

◆ 진중권> 그런데 저는 참 저 같으면 도망쳤을 것 같아요. 그 도청에 남아 있는다라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아니까 도청에 있는 동안에 어떤 생각이셨습니까?

◆ 양동남> 저희들이 믿는 게 뭐였냐면 당시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많이 들어왔었습니다. 외신기자들이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 당신들이 한 일주일만 버티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그런 외신기자들이 우리한테 그런 언질을 해 줬었어요. 그래서 그것도 믿은 부분이 있었고요. 또 두 번째는 광주 우리 도청 지하실에 탄약이 많이 있었습니다. 탄약과 수류탄 같은, 다이너마이트. 그때 이야기로는 이리 폭파사건보다는 훨씬 많은 다이너마이트와 폭약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설마설마한 것이죠, 저희들은.

◆ 김성회> 함부로 진압하고 들어오지 못할 거다라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그럼 선생님은 도청 안에서는 어떠한 일을 하셨나요?

◆ 양동남> 시민 질서, 좀 수상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민원 들어오면 가서 저희들이 그때 당시는 차량도 다니지도 않고 그랬으니까 저희들이 가령 임신부가 있는데 차량이 필요하다고 하면 저희들이 가서 실어다드리고.

◇ 박재홍> 전남도청 안에도 임신부가 있었어요?

◆ 양동남> 아니요.

◇ 박재홍> 아, 차량으로.

◆ 양동남> 광주 시내가 그때 당시는 8시면 통행금지였었어요. 5.18 항쟁 기간에는. 그래서 저희가 순찰을 다니다가 조금 어디 가고 있는 분들은 저희들이 모셔다드리고 그런 것으로 했죠.

◇ 박재홍> 전남도청에서 함께 있었던 동료들께서도 뭐랄까요, 굉장히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양동남> 다 했죠.

◇ 박재홍> 동료들끼리 그럼 어떠한 말씀을 나누시면서, 외신기자 말도 있었지만. 어떤 말을 나누시면서 버티셨을까요?

◆ 양동남> 저희 타격대 1조로 편입되었던 5명이 동네 선후배 지간으로 되어 있어서 굉장히 끈끈하게 엮여 있었습니다. 26일날도 도청 안에 돌아다니면서 계엄군들 들어오니까 다 빠져나가라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붙잡아서 도청 밖으로 쫓아냈었고. 그러고 있다가 이제 저녁에 계엄군을 저희들이 만난 것이죠.

◆ 김성회> 그 26일까지 그 5명은 서로 그러면 같이 다독이면서 같이 행동하셨겠어요, 나가시지 못하고. 그리고 26일에 계엄군이 들어온 건가요, 그럼? 들어와서 체포가 되신 건가요?

◆ 진중권> 다섯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그럼?

◆ 양동남> 5명은 다 생존해 있고요. 저희들이 마지막 순찰 이렇게 나갔을 때 그전에 지금 충금지하상가라고 있는데 그때 당시는 거기가 공사하고 있었어요. 거기를 막 지났는데 좀 1시 정도 되었을까. 이미 계엄군들이 거기까지 들어갔었죠. 도청에 들어가서 비상을 걸었고 타격대 우리 선서문을 보면 우리 시민군 기동타격대로서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계엄군 동태 파악 및 저지, 그런 선서문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 박재홍> 무엇보다 당시 가슴 아팠던 것은 무장하지 않은 비무장 시민들이 희생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더더욱 광주 시민 입장에서 분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 선생님도 그 당시에 기억나는 장면이라든가 이야기가 있으면 어떤 것이 있으셨을까요?

◆ 양동남> 많은 시신을 봤었고요.

◇ 박재홍> 많은 시신을.

◆ 양동남> 도청, 그러니까 우리가 체포될 때까지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도청 내 관 속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런 죽음 속에서 여성분이 목 졸라 죽는 시신하고.

◇ 박재홍> 목 졸려 돌아가시는 분이 있으세요? 계엄군이 목을 졸랐던 겁니까?

◆ 양동남> 그렇죠. 머리, 얼굴 자체가 날아가 버리신 분도 있고. 수많은, 잔인할 정도로 그런 시신들을 많이 봤습니다.

◆ 진중권> 체포 되신 다음에는 어떤 과정을 거치셨나요? 아무래도 혹독한 심문을 받으셨을 것도 같은데.

◆ 양동남> 저희들 같은 경우는 5.18로 인해서 5.18에서는 조직으로 구성된 것은 우리 기동타격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아주 심한 고문과 구타를 많이 당했죠.

◆ 김성회> 수사를 군에서 받으셨나요 아니면 경찰에서 받으셨나요?

◆ 양동남> 군에서 받았죠.

◇ 박재홍> 당시 그러면 건강도 많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 양동남> 제가 8월달이니까 3개월 만에 제가 처음으로 내가 거울을 봤어요. 8월 13일날 고문에 못 이겨서 육군통합병원으로 후송을 갑니다. 통합병원에 가서 처음으로 제 얼굴을 본 거예요. 거울로.

◇ 박재홍> 거울로?

◆ 양동남> 봤더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더라고요.

◇ 박재홍> 거울 속에.


◆ 김성회> 그런데 무엇을 진술하라고 그렇게 3개월 동안 집요하게 고문을 하던가요?

◆ 양동남> 저 같은 경우는 참 우스운 이야기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너 광주경찰서장 자리 주기로 했지 그러면서.

◇ 박재홍> 질문을 유도심문으로?

◆ 양동남> 그 서류, 진술 자체를 그렇게 몰고 가는 거예요.

◇ 박재홍> 만들어서 도장을 찍게 한다거나 그런 식의 고문을 받으셨던.

◆ 진중권> 그래서 내란음모로 몰아넣기 위해서 그랬던 거죠.

◆ 양동남> 저희 기동타격대는 전부 다 내란범입니다. 내란범으로 되어 있습니다.

◆ 김성회> 그러면 선생님, 그렇게 진술을 세 달이면 사실 열흘도 고문 버티는 사람이 없는데 세 달이면 충분히 그렇게 경찰서장 하기로 했다고 다 피신조서 작성을 하셨을 텐데.

◆ 양동남> 그것까지 안 했습니다.

◆ 김성회> 끝까지 안하셨습니까? 석 달을 버티시면서요?

◇ 박재홍> 어떻게 버티셨을까요?

◆ 양동남> 그래서 제가 후송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일 많이 맞았던 게 군 지휘봉이 있잖아요.

◇ 박재홍> 지휘봉? 막대기?

◆ 양동남> 그걸로, 그거 엄청 강하더라고요. 그걸로 등을 맞기 시작하는데 나중에 결국 맞는 후유증으로 해서 실려갔죠, 이제 통합병원으로.

◆ 김성회> 그럼 구타했던 자는 수사관이 아니고 어디서 장교가 들어와서 때렸던 건가요?

◆ 양동남> 처음에는 합수부에서 나와서 우리를 조사를 했었고요. 합수부에서 나와서 하고 난 이후에는 또 우리 이제 담당들이 바뀝니다. 일반으로 해서는 저희들이 되었었는데 기동타격대라 하니까 또 수사관들이 또 바뀝니다. 이제 그런 과정에 엄청 맞았고요. 저희들이 안 했다라고 했을 때는 항시 헌병들이 옆에 지켜 서 있습니다, 곡괭이 자루 들고.

◇ 박재홍> 곡괭이 자루? 들고 있는 자체로 엄청난 위험이 될 것 같은데.

◆ 양동남> 군대에서는 5파운드짜리 곡괭이 자루가 있습니다. 그걸로 우리가 아니다라고 하면 바로 그게 아무 데나 걸리는 대로.

◆ 김성회> 구타를.

◇ 박재홍> 그렇게 맞으셨어요?

◆ 양동남> 많이 맞았죠.

◆ 김성회> 그래서 병원에 실려가신 다음에는 고문이 끝났던 건가요?

◆ 양동남> 아니죠. 다시 좀 나으니까 헌병대로 다시 불러서 조사받고 그런 게 타격대 같은 경우는 4개월, 5개월간을 조사를 계속 받습니다, 수사관들이 바뀌어가면서.

◆ 진중권> 그 후에는 기소가 됐나요?

◆ 양동남> 네. 기소가 돼서 저는 내란 실행범으로. 내란 죄명도 그때 들었습니다, 내란죄라는 게.

◆ 진중권> 그때는 군법이죠? 군사재판이죠?

◆ 양동남> 그렇죠.

◆ 진중권> 그래서 형을 어떻게 받으셨나요?

◆ 양동남> 보통군법에서 그때 당시 제가 20세였으니까 미성년자로 분류가 되죠.

◆ 진중권> 다행이네요.

◆ 양동남> 5년에서 7년을 받았고요. 고등군법에서도 그대로 5년에서 7년을 받았어요.

◇ 박재홍> 이게 참 태어나서 법정에 선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참 어려운 일이지만 굉장히 억울한 상황으로 가셔서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문을 받으시고 5년, 7년형을 받으셨을 때의 심경이랄까요. 나라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 질문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어떠셨어요, 당시에?

◆ 양동남> 국가는 국민의. 갑자기 생각이. 그때 당시 이제 저희들은 공포심에 막 잡혀왔을 때 엄청난 공포에 아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그렇게 공포에 떨었거든요, 저희들이. 우리가 안에서 영창생활을 하면서 불렀던 노래들이 있어요. 양희은의 늙은 군인인가요?

◆ 진중권> 태어난 이 강산~.

◆ 김성회> 늙은 군인의 노래. 김민기 씨가 작곡했던.

◆ 양동남> 그걸 저희들이 투사의 노래로 개사를 해서 영창에서 불러요. 그러면 이제 헌병들이 그 노래 불렀다가 저녁 내내 기합을 주고 두드려패고 그런 것이 많이 있었어요. 당시 계엄군들이 저희들한테 자위권발동이다 그랬죠. 군인이 민간인한테 자위권 발동이 어디가 있습니까, 비무장인 사람들한테?

◇ 박재홍> 시민들에게?

◆ 양동남> 정말로 국가가 우리한테 이렇게까지 했구나라는 생각에…

◇ 박재홍> 당시 건강이 많이 상하셨고 또 여전히 그 아픈 기억을 저희가 떠올리게 해 드려서 너무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당시에 건강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은데 출소를 하셨을 것 같고요. 그 후의 생활은 어떻게 하셨던 겁니까?

◆ 양동남> 80년 12월 29일날 저희들이 각서를 쓰고 형 집행정지로 석방이 됩니다. 우리가 끝까지 지키자고 했던 부분들을 못 지키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금까지 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부분에 있어서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고요. 살아남은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고 있습니다.

◆ 진중권> 그 후로 보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후로 고통 속에 사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죠?

◆ 양동남> 많죠. 보상이라고 할 것 없이 93년도 노동자, 노동자 하루 일상 호프만식으로 해서 저희들이 보상을 받았습니다. 십몇 년 동안 몸이 아파서 약으로 치료했던 사람들은 다 약값으로 다 들어가고 그런 부분들은 전혀 돈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 나왔었고요. 우리 5.18 관련자들이 자살률이 아주 높습니다. 어느 기관에서인가 한번 조사를 해 봤는데 36%가 나오고요.

◇ 박재홍> 36%.

◆ 양동남> 이혼률 또한 60~70%. 엄청나게 높죠, 일반 시민들에 비해서는. 5.18 관련자, 직접 관련자들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허다하고요. 수면제 아니면 잠이 못 자시는 분들도 많이 있고 그렇습니다.

◆ 진중권> 오늘 5.18 기념식이 있었는데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도 대거 참석했어요. 소감이 남다르실 듯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광주=박종민 기자

◆ 양동남> 역대 대통령들, 우리가 반대했던 대통령들이 되어서 이렇게 의원들하고 같이 많이 왔던 건 처음인 것 같고요. 그다음에 저희들은 오늘 방문을 해서 헌법 전문에다가 수렴하겠다라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 박재홍> 5.18를 헌법에 명기하겠다라는 약속, 대통령의 약속을 기다리셨는데.

◆ 양동남> 그런데 헌법 정신이라고 말만 했지 헌법 전문에 실린다는 그런 말이 없어서 너무 실망스럽고요.

◆ 진중권> 앞으로 여야가 합심을 해서 꼭 헌법 전문에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 양동남> 저희들 바람도 그렇습니다.

◆ 진중권> 대통령도 약속 꼭 지키셨으면 좋겠고요. 공약이었는데.

◆ 김성회> 이게 사실 5.18에 직접 광주항쟁에 참여하셨던 당사자로서는 이게 헌법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행동이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었다라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라서 더 남다르실 것 같아요.

◆ 양동남> 그렇죠. 왜곡되었던 부분들도 다 바로잡힐 것 같고요. 그렇습니다.

◇ 박재홍> 4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 정말 긴 세월이지만 또 기억을 떠올리시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우리 선생님은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 같은데. 해마다 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앞으로 5.18 관련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남은 과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선생님?

◆ 양동남> 물론 진상규명하고 책임자 처분이 이미 두 분이 돌아가셨으니까 할 이야기도 없고요. 5.18 당시 42년 전에 돌아가신 행방불명자들. 그분들이 지금 솔찬히 많이 있습니다, 광주에. 그분들 찾을 수 있으면.

◆ 김성회> 그럼 그건 암매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시?

◆ 양동남> 그렇죠.

◆ 김성회> 그 부분에 대해서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정부들이 노력을 해 온 것은 맞는 얘기죠?

◆ 양동남> 그렇죠.

◇ 박재홍> 관련해서 어떤 추가적인 증언이나 이런 게 필요할 텐데. 이런 것들이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려운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 양동남> 그런 부분이… 제가 최초의 양심선언자 허정환 씨와 두 번째 양심선언했던 최영신 씨. 그 두 분들 다 만나보고 그랬는데 양심선언 정도 할 정도면 국가에서 책임을 져야 되거든요. 지금 최영신 씨 같은 경우는 양심선언하고 나서 도망다녔습니다. 공수특전단, 당시 같이 광주에 침투했던 계엄군들. 잡으러 다니고 그래서 피해다니고 그랬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해결이 되지 않고는 절대 누가 양심선언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 김성회> 선생님, 지금 가해자들 경우에 좀 더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증언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말씀 주시는 거죠?

◆ 양동남> 네.

◇ 박재홍> 말씀하신 그런 부분들 앞으로 광주, 5.18 관련해서 우리가 새롭게 명예회복을 위해서 추진해야 할 그런 일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좀 여러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으셨다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게 또 바라는 점 혹은 국민들에게 42주년된 광주민주화운동 어떻게 생각해 달라,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다면 그 말씀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 양동남> 저희들이 원래 거짓된 이야기들은 빨리 퍼지고 사람들이 많이 믿게 됩니다. 저희들은 물론 가짜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우리와 같이 연루되어 있어서 아마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요. 북한군도 개입이 없었고 역대 국방장관들이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라고 다 말을 했는데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좀 왜곡된 부분을 안 믿으셨으면 합니다.

◇ 박재홍> 그러한 5.18의 진실,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저희 언론도, 저희 방송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양동남 선생님 오늘 말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양동남>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박재홍> 지금까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양동남 씨였습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