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고교 진학 포기해야 했던 신유빈, 고민하는 韓 전설의 딸 ②사교육에 부담 느는 학부모, 쉬지 못하는 학생 선수 ③'韓 체육 딜레마' 성과 없인 지원 없고, 지원 없인 성과 없고 ④韓 장애인 체육, 외형적 발전에도 접근성 부족…여전히 아쉬운 관심 ⑤건강한 전문 체육 시스템 구축을 위한 새 정부의 로드맵은? |
신유빈(18·대한항공)은 한국 여자 탁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꼽힌다. 5살에 라켓을 잡으며 '탁구 신동'으로 불리던 신유빈은 중학교 3학년이던 지난 2019년 14세 11개월 6일의 나이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만 15살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던 이에리사 전 태릉선수촌장과 유남규 삼성생명 감독을 넘어 역대 최연소 탁구 국가대표가 됐다.
그런 신유빈은 2020년 고등학교 진학 대신 곧바로 실업 무대로 진출해 또 다시 화제가 됐다. 2014년 윤효빈도 고교 진학 대신 실업 대우증권(현 미래에셋증권)에 입단했던 사례가 있었다. 다만 윤효빈은 대한탁구협회 규정에 따라 국내 대회에 3년 동안 출전할 수 없었으나 신유빈은 협회의 선수(경기인) 등록 규정이 바뀌어 제약이 없어졌다.
이후 신유빈은 지난해 도쿄올림픽에 출전해 한국 탁구 역대 최연소 올림픽 출전 기록을 세웠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5회 올림픽 출전의 58살 노장 니시아렌(룩셈부르크)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15위의 강호 두호이켐(홍콩)과 접전을 펼치며 한국 탁구의 스타로 떠올랐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전지희(포스코에너지)와 21년 만의 여자 복식 우승도 합작했다.
일견 신유빈은 꽃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17살의 나이에 한국 탁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고교 진학 대신 실업 무대로 직행한 것은 최상의 선택이 된 모양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신유빈이 실업 직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신유빈의 아버지인 신수현 GNS 매니지먼트 대표는 CBS 노컷뉴스와 최근 인터뷰에서 "사실 유빈이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탁구 선수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고교생의 삶은 버려야 했다는 것이다.
신 대표는 "유빈이가 최연소 국가대표에 선발되긴 했지만 학생 선수의 '출석 인정 결석 허용 일수' 제한에 걸려 도저히 정상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돌아봤다. 정부는 지난 2019년 6월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라 학생 선수의 대회와 훈련 참가를 위한 결석 허용을 초등학교 10일, 중학교 15일, 고등학교 30일로 제한했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영향이 컸고 고교 진학 포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신 대표는 "대회를 나가면 시험을 못 보게 되는데 졸업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면서 "고교 때도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몇 번이나 교육청에 갔지만 유빈이만 특혜를 줄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탁구의 경우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세계 랭킹이 중요하다. 상위 랭커일수록 하위 랭커와 맞붙는 좋은 대진을 받기 때문이다. 랭킹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에서 성적을 내야 한다. 그러나 신유빈은 수업 일수의 제한을 받는 까닭에 고교 진학을 포기한 부분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교육부는 올해 출석 인정 결석 허용 일수를 초등생은 0일, 중학생 10일, 고교생은 20일로 축소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신 대표는 "유빈이 같은 학생 선수는 탁구에 인생을 걸었는데 그러려면 고교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라이벌인 일본은 이런 제한이 없어 하리모토 도모카즈 같은 탁구 신동이 나온다"면서 "이렇게 가다간 우리 선수들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리모토는 16살부터 남자 단식 세계 4위까지 오른 탁구 천재로 일본은 지난해 올림픽 혼합 복식 금메달을 따낸 이토 미마 등을 집중 육성해 중국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한국 탁구의 전설로 불리는 유남규 감독도 고민이 깊다.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유 감독의 딸 유예린 역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탁구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인 유예린은 올해 만 16세 미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발군의 기량을 뽐내는 등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내년이면 고교 진학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유 감독은 "여건이 된다면 유빈이처럼 실업 무대로 바로 갈지, 고교에 진학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면서 "새 정부에서도 정책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고교 학생 선수로 활동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어 "유빈이나 김나영처럼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고교 생활에서 얻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결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17살 김나영도 고교 진학 대신 올해 포스코에너지에 입단해 올해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 제 2의 신유빈으로 기대를 모은다. 김나영 역시 신유빈과 비슷한 이유로 실업행을 선택했다.
학생 선수를 위한 정책이라지만 오히려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 감독은 "천편일률적으로 규정을 적용하면 도저히 다른 국가의 선수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면서 "어릴 때 기량에서 한번 뒤지기 시작하면 커서도 뒤집기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다른 종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탁구처럼 세계 랭킹이 중요한 배드민턴도 학생 선수들의 경기력 저하가 우려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혼합 복식 금메달을 따낸 최고 스타 이용대(요넥스)는 "올해 입단한 진용 등 최근 어린 선수들의 체력과 기량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면서 "수업도 좋지만 운동에 인생을 건 선수들은 훈련과 경기를 해야 하는데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털어놨다.
여자 배드민턴 에이스 안세영(삼성생명)도 걱정이 크다. 안세영은 "나는 그나마 광주체고를 다녀서 나았다고 하지만 국제 대회 출전 등에서 제약이 없지 않았다"면서 "선수 생활이 길지 않기 때문에 어릴 때 더 많은 대회에 나가야 경험을 쌓을 텐데 쉽지 않다"고 현실을 짚었다.
인기 종목인 야구도 학생 선수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고교 야구 관계자는 "정부에서 대회를 방학과 주말에만 하라고 하는데 전국 대회를 치르려면 평일에 경기를 할 수밖에 없다"면서 "수업 때문에 경기 직전 선수들이 도착해 몸도 못 풀고 시합에 나가더라"고 혀를 찼다. 이어 "일반 학생은 부모와 여행을 가도 수업으로 인정을 받는데 학생 선수는 훈련이 아닌 대회 출전이 큰 교육이 되는데도 결석으로 처리되니 어이가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부는 출석 인정 결석 일수 제한에 대해 "운동으로 성공한 1%의 엘리트가 아닌 꿈을 이루지 못한 99%의 학생 선수들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취지를 설명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고교 야구 관계자는 "프로에 가는 선수들은 손에 꼽고 대학에 진학해 지도자를 꿈꾸며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선수들이 대부분"이라면서 "이런 학생 선수들의 꿈을 오히려 정부가 막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는 지난달 학생 선수의 '출석 인정 결석 허용 일수'에 대해 스포츠혁신위 권고 이전 수준인 '연간 수업 일수의 3분의 1' 범위 내에서 종목 특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과연 새 정부가 고통을 받고 있는 학생 선수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