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핏빛으로 물들고 고문 소리 진동한 1980년 5월 전남대 캠퍼스의 진실 (계속) |
1980년 5월 20일 밤 전남대학교 이학부 강의실.
이날 계엄군으로 5·18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된 3공수는 주둔지인 전남대에 시민들을 구금하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대검으로 시민들의 머리와 발뒤꿈치를 내려치는 등 온갖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온종일 공포에 떨어야 했고 강의실 안은 피비린내 속에 신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혀 전남대 이학부에 구금당한 강길조씨는 "군인들은 머리에서부터 목, 허리, 다리 상관없이 짐승 패듯이 팼다"라면서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지졌다"고 말했다.
당시 전남대 학생과장 서명원씨는 "이학부 1층 교실 하나에는 피가 낭자하고 또 다른 교실 하나는 머리카락을 비롯해 옷, 신발까지 널려있었다"며 "여기서 시민들이 고문을 당했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금된 시민들 가운데 1~2명은 현장에서 끝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식 집계된 5·18 사망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또 1980년 5월 21일 오전 3공수는 전남대 일대에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지만 지금까지도 희생자 수는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5·18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가 발포명령자와 암매장 문제 등에 밀려 공론화되지 못하면서 정확한 피해자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18진상조사위는 전남대 이학부에 구금된 피해자를 104명으로 잠정 발표했지만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5월 21일 오후 광주교도소로 옮겨졌거나 상무대 영창 등으로 이송된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진상조사위)는 21일 전남대 일원에서 숨진 임산부 최미애씨가 계엄군의 저격으로 숨졌다는 가해자의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5·18진상조사위가 5·18 민간인 학살 사건의 정확한 진실 규명을 위해 면밀한 조사를 벌이고 있어 조사 결과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최초의 5·18 기록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쓴 이재의 박사는 "민간인 학살 부분은 당연히 밝혀져야 하지만 당시 계엄군이 연행한 피해자들을 여기저기로 나눠 보내 숫자는 가늠조차 안 된다"라며 "지금 5·18진상조사위에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