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25년 만의 남북 첫 대화…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나갔다(종합)

1971년 9월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 임할 대표자 명단을 교환하는 모습. 오른쪽이 남측, 왼쪽이 북측 연락원들이다. 연합뉴스
통일부는 4일 남북 회담 관련 일부 문서를 시범 공개했다. 분단 이후 남북대화의 첫 문을 연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관련 문서이다.
 
분단에 이어 전쟁까지 치른 남북이 공식적으로 첫 대화를 나눈 것은 지난 1970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에서였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1970년 8월 12일 방송을 통해 남북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제네바 예비회담을 제의하자, 손성필 북한 적십자회 위원장이 이틀 뒤 판문점 회담으로 수정 제의한 데 따른 것이다.
 
손성필 위원장은 남북 예비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연락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신임장을 가진 파견원들이 판문점에서 서신을 교환하는 방법으로 연락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면서, "8월 20일 12시에 우리 적십자회의 서신을 가진 2명의 파견원을 판문점에 보내려고 한다. 그 시각에 귀사의 파견원이 현장에서 우리의 서신을 수교받기를 바란다"고 제안했다.

통일부가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의 남북회담 문서들을 4일 일반 국민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통일부 제공

첫 대화 南 "안녕하십니까" 北 "동포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일부는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의 남북회담 문서 및 사진들을 4일 일반 국민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사진은 첫 남북 접촉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그래서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고 일단 나가 만난 것이 바로 분단 25년만의 첫 남북 공식 대화, 즉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였던 셈이다. 남측에서 2명(이창열 부장, 윤여훈 섭외부 참사), 북측에서 2명(서성철 문화선전부 부부장, 염종련 적십자회 지도원)이 나왔다.
 
공개된 사료에 따르면 남측에서 첫 대화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자, 북측에서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남북의 파견원들이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갖고 온 신임장을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하고 상대방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는 풍경도 연출됐다.
 
"남북이 처음 접촉하는 자리이다 보니 이름도 알지 못하고 나갔을 것"이라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예를 들자면 신임장 제시 후 남측에서 "어느 쪽이 주 대표 선생이신가요? 오른 쪽이 염 선생이고 이쪽이 서 선생인기가요?"하고 물으니, 북측에서 "제가 서성철이고 이쪽이 염종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였다.
 

첫 접촉 3분 종료…접촉 이어가며 냉랭한 분위기 누그러져

이는 냉전 속에 체제 경쟁을 벌이던 남북이 당시 미중 간에 조성되는 데탕트 흐름에 자극받아 매뉴얼도 없는 상황에서 회담을 전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벌이진 에피소드로 풀이된다.
 
25년 만의 첫 만남인 만큼 이날 대화 분위기는 다소 차가웠다. 문서 교환 뒤 북측이 "그러면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만합시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종료를 재촉함에 따라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이날 첫 대화는 3분 만에 끝났다.
 
그러나 이후 파견원 접촉을 4차례 더 이어가면서 분위기는 비교적 누그러져갔다. '이미 구면이고 형제인데 신임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냐'는 북측의 제의로 신임장 확인 절차를 생략했고, 고향과 개인사 등에 대한 얘기도 오고 가게 됐다.
 

남북 첫 합의서 채택으로 회담 운영 매뉴얼 마련

파견원 접촉과 예비회담을 거쳐 1971년 9월 29일에는 향후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 틀이 되는 합의서가 채택됐다.
 
남북이 최초로 채택한 합의서로, 예비회담 장소와 상설 회담연락사무소 설치, 수행원 수와 배치 문제, 회의 기록과 확인 방법, 발언 방식, 회담 공개 여부, 차기 예비회담 일시, 회담 내용의 공표 문제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
 
상설 회담연락사무소의 경우 남측은 자유의 집, 북측은 판문각에 설치하고, 각각 2명의 근무원을 두기로 했다. 여기에 남북직통 전화도 설치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하도록 했다. 남북회담의 기본 매뉴얼이 마련된 셈이다.
 
남북은 이 합의에 따라 예비회담을 이어나가 마침내 1972년 6월 5일 적십자 본 회담에서 논의할 5개 항의 의제를 채택한다.
 

남북회담 첫 의제 이산가족 관련 5개항 확정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며 알리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인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서신거래를 실시하는 문제,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항이다.
 
의제를 확정하기까지 남북 간에는 치열한 신경전도 벌어졌다. 남측이 이산가족 생사확인을 먼저 한 뒤 단계적인 상봉을 강조한 반면 북측은 친우까지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상봉을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이 폭넓은 왕래와 상봉을 강조한 것은 남한 내 친북 세력 양성을 꾀하는 통일전선을 의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남북의 치열한 기싸움…대화 중 체제 선전도 열중

오가는 대화 속에 서로 체제를 선전하는 일도 많았다. 특히 1971년 9월 3일 4차 파견원 접촉에서는 남측 이창열 부장이 "우리는 1년에 언챙이 수술로 300~400명을 치료한다"며 "72년이면 우리 남한에 언챙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하자, 북측 염종련 지도원은 "우리는 언챙이 수술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서게 한다"고 대응하기도 했다.
 
이산가족 의제는 남북 간에 해결하기로 합의한 최초의 의제이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의제로 평가된다.
 
이산가족 의제 합의 한 달 뒤에 남북은 별도의 비밀 접촉을 통해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문서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악수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 남북회담 문서 공개 확대 예정

통일부는 이번 남북회담 문서 시범공개를 시작으로 향후 규정에 따라 남북회담 문서 공개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에 앞서 통일부는 남북회담 사료 공개를 위해 올해 1월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해 법적 근거를 갖췄다.
 
통일부는 규정에 따라 예비심사·유관기관 협의·'남북회담문서 공개심의회' 등을 거쳐 문서들을 선별하고 공개해나갈 예정이다.
 
공개된 문서는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남북회담본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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