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야간 열병식 연설에서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며,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의외의 자기의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국가의 근본이익'이 침탈되는 상황을 조건으로 달았지만, 핵 무력 사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셈이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근본 이익'은 일반적인 영토 침범과 전쟁을 넘어 좀 더 주관적인 내용으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핵 무력 사용의 범주를 보다 공세적으로 넓혔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오후 10시부터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실시된 열병식 본 행사 연설에서 "격변하는 정치 군사 정세와 앞으로의 온갖 위기에 대비해 억척같이 걸어온 자위적이며 현대적인 무력건설의 길로 더 빨리, 더 줄기차게 나갈 것"이라며, "특히 우리 국가가 보유한 핵 무력을 최대의 급속한 속도로 더욱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우리 핵 무력의 기본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에까지 우리의 핵이 전쟁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며,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의외의 자기의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설정한 핵 무력의 기본 사명은 전쟁 억제에 있지만, 근본 이익이 침탈될 경우에는 제2의 사명, 즉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핵 무력의 첫째 사명이 전쟁 억제, 둘째 사명이 근본이익 수호라고 천명했다는 점에서 이번 연설은 김정은의 '4.25 핵 독트린'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며, "근본 이익이라는 것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개념이라면 앞으로 시시때때로 한미를 압박하기 위해 핵 무력 사용을 강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의 핵사용 교리는 그동안 적대적 핵보유국의 침략 및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격퇴하고 보복 타격할 때로 한정했는데, 이번 연설을 통해 근본 이익을 침탈당하는 특정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다"며, "미국이 최근 핵 태세 검토보고서에서 '극단적 상황'을 전제로 핵 선제타격 가능성을 열어 둔 것에 대응해 북한의 핵사용 교리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이 핵 무력을 '최대의 급속한 속도'로 강화하겠다고 강조한 것은 일단 8차 당 대회에서 천명한 핵·미사일 개발 계획을 5년 시한 내에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관측된다.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출범으로 한미동맹이 강화되는 추세에 대응해 화성 17형 발사와 7차 핵실험 등 핵미사일 도발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뜻도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박원곤 이대 교수는 "올 들어 집중적인 핵미사일 발사를 감행해온 북한이 이를 지속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라며, "북한은 이미 모라토리엄을 파기했기 때문에 앞으로 핵실험 등 '속도전' 형태로 핵미사일을 발전시키는 행위를 연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은 또 "국력의 상징이자 우리 군사력의 기본을 이루는 핵 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해 임의의 전쟁 상황에서 각이한 작전의 목적과 임무에 따라 각이한 수단으로 핵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공화국의 핵 무력은 언제든지 자기의 책임적인 사명과 특유의 억제력을 가동할 수 있게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물론 이번 연설에서 남한과 미국을 향한 직접적인 비난 발언을 하지 않는 등 수위조절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북한 김여정 당 부부장이 최근 대남비난 담화에서 남한을 겨냥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한데 이어 김 위원장이 직접 연설을 통해 핵 무력 사용 범위를 영토 침범 등 전쟁 상황만이 아니라 근본 이익이 침해되는 경우로 확대함으로써 대남 대미 위협 수위를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김 위원장은 이번 열병식에 이례적으로 흰색 원수복 차림으로 등장했고 부인 리설주 여사도 함께 참여했다.
특히 지난해 7월 문책 이후 보직이 불분명했던 리병철은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및 당 중앙위원회 비서 직함으로 함께 소개돼 복권된 사실이 확인됐다. 열병식에서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7형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