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로 인해 1억 원 넘는 돈을 빼앗긴 40대 A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관련기사: [단독]또 목숨 앗아간 보이스피싱…억대 피해자 극단적 선택)
경찰에 따르면 지난 2월 25일 A씨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흔적이 발견됐으며, 유서는 없었다. 다만 A씨 주변인들은 "최근 보이스피싱 피해를 크게 당해 많이 힘들어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금융기관 관계자'를 사칭한 이들은 A씨에게 접근해 "지금 가지고 있는 대출금보다 훨씬 저렴한 이자로 대출해주겠다"며 기존 대출금의 상환을 요구했다. 이에 A씨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자칭 '금융기관 직원'에게 3일 동안 10차례 걸쳐 1억 6천만 원 상당의 돈을 전달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김민수 검사'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 2020년 1월 자칭 '김민수 검사'가 "범죄에 연루됐다"고 말한 데 속아 20대 취준생은 11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전북 정읍에서 서울까지 장소를 수차례 옮겨가며 돈을 전달했다. 사칭범은 "전화를 끊었으니 공무집행방해죄다"며 피해자를 다그쳤고,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 지난해 4월 지인이 SNS를 통해 전한 부고 소식으로 배우지망생 조하나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조씨는 보이스피싱으로 200만 원가량 돈을 잃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해 10월 춘천에서 50대 자영업자가 대출을 해주겠다며 금융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 900만 원을 빼앗겼다. 사건 당일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다음날,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보이스피싱 예방도 좋지만…이미 당한 사람은요?
보이스피싱 범죄를 막기 위한 대책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기획재정부는 '보이스피싱 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발신 기업의 브랜드 로고·프로필 등을 노출해 사칭을 방지할 수 있는 기업형 RCS 메시지 서비스를 도입하도록 권고하고, 보이스피싱 사건을 관련 기관에 동시 신고가 가능하도록 통합신고시스템도 구축한다.이밖에 일정 금액 이상 거래 시 이체가 즉시 이뤄지지 않도록 한 '지연인출제도', 지정 단말기에서만 뱅킹 거래를 하도록 하는 등의 다양한 '전자금융사기 예방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이들을 위한 구제수단이나 치료 등은 미흡한 게 현실이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한 피해자 지원 제도'가 긴급구호, 생계비‧심리치료비 지급 등 신체‧정신‧재산상 지원을 하지만, 이는 살인‧상해 등의 강력범죄 피해자와 가족에 해당한다. 보이스피싱은 재산범죄로 민사 사안이기 때문에 제도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재산상 피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긴 하다. 신용회복위원회가 보이스피싱 피해자 등 금융관련 피해자에게 저금리로 긴급자금을 대출해주고 있다. 그러나 최대 대출한도가 500만 원으로, 경찰청 자료에 따른 2020년 기준 보이스피싱 평균 피해액 2200여만 원에 비해 부족한 실정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돈을 되찾기 위해 대부분 은행에 피해구제신청을 가장 먼저 한다. 피해자가 송금한 은행은 사기이용계좌임을 확인한 뒤 지급정지를 한다. 이후 금융감독원에 채권소멸절차 개시 공고를 요청한다.
금감원은 개시 공고 후 이의제기 없이 2개월이 지나면 해당 사기이용계좌의 채권을 소멸시킨다. 이로부터 14일 이내 금감원이 피해환급금을 결정하고, 은행이 피해자에게 환급한다.
앞으로 금융사가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배상할 가능성도 커졌다. 지난달 25일 금융위원회의 인수위 업무보고에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을 금융사가 배상하는 방안이 담긴 보이스피싱과 불법사금융 대책이 포함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보 시절 보이스피싱 법 집행 강화, 금융소비자 피해구제제도의 실효성 제고 등을 공약했다.
잊히지 않는 '목소리'…속으로 '끙끙' 앓는 피싱 피해자들
"한동안 나이 많은 남자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 목소리가 생각날 정도였어요. 그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이걸 어디 알리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부터가 치료의 시작인 것 같아요."2016년 사회초년생 시절 보이스피싱 피해로 600만 원을 잃은 30대 A씨는 지금도 범죄자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A씨는 6일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회사에서 일하던 중 전화를 받았는데 권위적인 목소리에 눌려 그 사람의 말을 따라 카페로 가서 은행 사이트처럼 세팅된 곳에 개인정보를 입력했다"며 "보이스피싱에 당하고도 창피해서 가족에게만 겨우 알리고 엄청 울었다"고 피해 당시를 회상했다.
"경찰에도 달려가 봤지만 범죄자가 국내에 있지 않은 데다, 당시 나에겐 큰돈이었는데 억대 피해자들에 비하면 액수도 적어서 포기하라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범죄자들의 사기이용계좌를 찾아 A씨는 피해액 600만 원 중 25만 원을 환급받게 됐다.
그는 "지금에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피해를 당하면 돈을 다 찾는 건 포기하게 된다"며 "피해자들을 위한 정신적 지원이라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보이스피싱은 사기죄와 컴퓨터 등 사기이용죄, 통신사기피해환급법 등이 적용될 수 있는데 많이 따져봤자 법령이 얼마 안 돼요. 사기 당한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범죄자에게 금전적으로 손해 주는 형사조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보이스피싱 범죄는 기소율도 낮고 형사적 책임을 다 묻기도 참 어려워요. 그래서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치유가 필요한데, 피해 회복은커녕 남들한테 이야기하면 우스운 소리만 듣는 거예요. 속으로 끙끙 앓는데 정신적인 피해 보전은 누구도 안 해줘요. 그래서 피해회복센터가 필요하다는 거죠."
동국대 국제정보대학원 황석진 교수는 지난 5일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일선 경찰서에 가보면 대부분 경제팀이 제일 많은데 그만큼 경제범죄가 많다는 뜻"이라며 "지난해 보이스피싱예방협회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 90% 이상이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다"고 밝혔다.
"비대면으로 범죄를 당했다면 소통 채널에서 오는 목소리 등 트라우마가 남고, 특히 대면편취 피해자는 정신적 고통이 훨씬 가중된다"며 "피해자들 접근이 용이한 지자체 차원에서 정신적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