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이명박 정부 화두였던 '녹색'이 현재 훨씬 무거운 의미로 금융계에 확산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세계 각국은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데 공식적으로 합의했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로 뜻을 모으는 등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막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계가 빨라진 만큼 공적 영역은 물론 민간의 온실가스 감축을 부채질하기 위한 돈의 흐름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과거 '착한 은행'을 광고하는 용도로 소비되는 데 그쳤던 녹색금융 개념은 이제 막대한 자금이 지속가능한 기업을 찾아가기 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투자의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친환경 기업에 트이는 자금줄…녹색채권 '17조 원'
기업과 가계에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도록 금융권이 협조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기업금융이나 프로젝트파이낸싱(PF), 펀드, 벤처투자 등 중개기능 과정에서 녹색산업을 지원하거나 투자나 대출심사에서 에너지효율 관련 설비를 갖춘 친환경 기업에 가점을 줘 친환경 활동을 유도할 수 있다. 탄소배출권 거래 역시 녹색금융의 한 부분이다.
2017년 3월 말 2455억 원 규모였던 국내 ESG펀드 설정액도 지난달 말 기준 3조 9858억 원으로 5년 새 16배나 커졌다.
현대캐피탈은 2016년 국내 민간기업 중 처음으로 녹색채권을 발행한 후 최근까지 약 3조 5천억 원에 달하는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조달한 금액은 전기차나 수소차 등 친환경 차량 할부나 리스, 렌트 등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비금융사의 녹색채권 발행, ESG펀드 설정과 투자도 자연스러워졌다. 올해 1분기에만 한화, SK실트론, S-Oil, LG디스플레이, 롯데렌탈, 한솔제지 등 12곳의 민간기업이 녹색채권 발행에 나섰다.
온실가스 주범 '손절'은 망설이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환경을 개선하는 상품·서비스에 돈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 뿐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 등 환경파괴 활동으로의 자금 유입을 차단하는 것 역시 녹색금융의 중요한 축이다. 시중자금이 '친환경' '녹색' 수식어를 따라 크게 쏠리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투자금 '손절'에는 약한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석탄발전 누적 투자금액이 많은 상위 5개 기관 중 국민연금과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까지 공공기관이 3곳이다. 국민연금과 함께 세계 3대 연기금에 속하는 네덜란드 연기금 운용사 APG가 지난 2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들에 주주서한을 발송하며 그간 탄소감축 전략의 성과와 적절성 등을 따져 묻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제조업 기반의 국내 산업 특성상 화력발전 비중이 여전히 높고, 국민연금을 비롯한 금융권은 이같은 기업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자금을 대고 있는 상황이다.
녹색금융, '그린워싱' 반복하지 않으려면
녹색금융은 이미 14년 전 이명박 정부에서 내건 핵심 국정과제였지만 상당부분 '그린워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린워싱은 실제로는 전혀 친환경적이지 않음에도 각종 초록빛 수식어를 붙여 눈속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석탄발전을 한껏 이용하고 공정에서 각종 온실가스를 내뿜으면서도 사무실에서 재생종이를 사용한다며 '친환경 기업'으로 홍보하는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석탄발전소에서 '청정석탄'. '친환경 발전'이라고 근거 없는 홍보 문구를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직관적인 녹색사업들에 비해 간접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녹색금융은 그린워싱이 가장 쉬운 영역 중 하나다. 전혀 친환경과 관련 없는 기존 금융상품이나 대출, 프로젝트 등에 모두 '녹색', '그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정부 정책에 협조하는 모양새만 취하는 일이 흔했다.
다만 지난해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와 그 가이드라인이 확정되면서 투자자는 물론이고 녹색사업을 하려는 기관들도 보다 명확한 방향성을 갖고 행동할 수 있게 됐다. 자금조달을 통해 참여하려는 사업은 최소한 △온실가스 감축 △기후변화 적응 △물의 지속가능한 보전 △자원순환 △오염 방지 및 관리 △생물 다양성 등 '6대 환경목표' 중 하나 이상을 품어야 하고 이를 위한 기술적 수준을 갖춰야 한다.
ESG펀드를 운용하는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0%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그린워싱으로 낭비할 시간도 부족하다는 데 공감한다"며 "차기 정부에서 투자자와 녹색사업 주체 간 정보 불균형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녹색금융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