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구순이 된 강순희씨는 얼마 전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에게 소주병을 던진 남성이 '인혁당'을 거론하는 모습과 언론 보도를 보며 분노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확정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故우홍선씨의 아내다. 해당 사건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과 2008년 사법부 재심에서 사건 관련자 전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40대 남성 이모씨는 지난 24일 대구 달성군에서 연설하던 박근혜씨에게 소주병을 던져 특수상해미수 등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인혁당 사건'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경찰 조사에서 "박근혜가 인혁당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안 해 피해자들을 대신해 소주병을 던졌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4.9통일평화재단(4.9재단)에 따르면 이씨는 실제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대만과 일본 본토에서 중국인을 쫓아내겠다'는 목적의 '인혁당' 가입을 요구하는 등 이미 조작된 것으로 드러난 단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 사이트에 '인혁당 사건' 사형 피해자 8인 사진을 올려놔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피해자 유족인 강씨는 "'인혁당 사건' 피해 가족들은 그렇게 바보 같고 법에 어긋나는 못된 짓은 안 한다"고 전했다.
"배상금 토해내라"…현재 진행형 '인혁당 사건'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상황은 악화했다. 2013년 7월, 국정원은 '인혁당' 피해자 77명에게 가집행된 배상금 491억여 원에 대해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다.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 등을 받은 생존 피해자와 가족들이 대상이었다.
대법원은 배상원금과 지연 이자로 이뤄진 전체 배상금에서 '34년 치 지연 이자(연 5%)'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이자 기산점을 2009년, 2010년 선고일로 결정했다. '인혁당 사건' 사형 피해자 재판을 포함해 법원은 그전까지 불법행위 성립일부터 손해배상 채무 지연금을 계산해왔는데, 판례가 바뀐 것이다. 이로써 30여년 치 이자가 사라졌다.
'법률심'으로 예상했던 대법원판결이 뒤바뀐 데다 원심판결로 돌려보내지도 않아 피해자들은 충격이 컸다. 당시 배상금을 받은 피해자들은 그동안 쌓인 빚을 갚고 4.9통일평화재단을 설립, 인권 단체에 후원하는 등 받은 금액을 대부분 다 썼다. 나머지 3분의 1 배상금을 받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은 피해자들에게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걸었고 승소했다. 국정원은 반환금뿐만 아니라 매년 20%에 달하는 연체 이자도 청구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들이 토해내야 하는 배상금과 연체 이자가 가지급된 배상금을 넘어서는 상황이 됐다.
4.9재단에 따르면 현재 소송을 당한 피해자 및 가족 중 일부는 이 돈을 갚았고, 사정이 어려운 이들은 통장이 압류되는 등 신용불량자로 남았다. 4.9재단 이창훈 사료실장은 "한 피해자 손주가 대학 장학금을 받았는데 30만 원만 남겨놓고 통장에서 싹 빠져나간 경우가 있었다"며 "어머니가 배상 판결이 나오기 전 일찍 돌아가셨는데, 밑에 자녀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알아보니 상속받은 재산에 국정원 '부당이익 환수' 빚이 있던 것"이라고 전했다.
문재인 정부, 민주당도 손 놔…해결 전망은?
민주화운동 공훈자인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부당이득금을 내는 상황에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2017년 12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제6차 권고안을 발표하고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가지급받은 배상금을 반환해야 하는 반인권적 범죄 피해자들에 대해 정부는 이들이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배상금 반환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2019년 2월 국가인권위원회도 "인혁당 피해자들이 부당이득금 반환 문제로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조속히 해소하고, 국민 보호책임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도록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의견을 냈다.
그러나 해결은 난망했다. 피해자 이창복씨는 강제 경매 청구 이의 소송을 걸어 2020년 5월 법원으로부터 '배상액 일부를 먼저 갚으면 경매를 취하하자'는 등의 화해권고결정 조정안을 받았다. 그러나 국정원이 "과다 지급분 환수를 포기하면 배임 행위가 될 수 있다"며 거부했다.
2020년 국회에서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사례로 들며 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국가채권 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기획재정위원회에 무한 계류 중이다. 해당 개정안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피해를 당한 채무자가 예상치 못하게 국가에 대해 채무를 부담하게 되거나, 국가가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헌법상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정부가 제반사정을 참작하여 채무를 감면할 수 있게 개선하고자 하는 취지다.
이씨 아들인 이송우 시인은 이 같은 상황에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하면서 정작 피해 받은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해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며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한 인권위 의견 표명에도 대를 거쳐 피해 보는 인혁당 사건 당사자들을 모르는 척하는 모습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부와 법원, 국회 등 민주주의 3권이 모두 외면하고 있는 인혁당 피해자들에 대한 대국적 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나기 전 해결을 보고 가면 좋겠다"며 "윤석열 당선인이 국민 통합을 정말 염두에 두고 있다면 국가가 피해자들을 괴롭힌 사건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