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재고가 7만 명분 가량 남았고 정부가 처방기관을 잇따라 확대해 왔음에도, 일부 현장에서는 여전히 환자들에게 '약이 없어서 못 준다'는 얘기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전달시스템과 함께 재택치료 환자들의 모니터링과 처방을 담당하는 동네 병·의원이 팍스로비드를 보수적으로 처방하고 있는 점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2주 전보다 처방량 4배 '급증'에도…"재고가 있다는 게 넌센스"
23일 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국내에 도입된 팍스로비드 물량은 총 16만 3천 명분이다. 올 1월 14일 투약을 시작으로 두 달여간 8만 7천 명분이 사용돼 지난 20일 기준 재고량은 7만 6천 명분 수준이다.앞서 정부가 밝힌 계약 물량이 76만 2천 명분임을 감안하면, 이제 21%가 조금 넘는 수준의 물량만이 들어온 셈이다. 문제는 당국이 보유하고 있는 물량마저도 필요한 환자들에게 그리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있단 점이다.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천은미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외래로 임상 증상이 있는 고위험군 환자들을 보고 있는데, 최근에 팍스로비드를 받았다는 분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정말 황당하다"고 말했다.
한국의학연구소 학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상엽 감염내과 전문의도 "상황이 이렇게 급박한데 한달 반 정도 되는 기간에 (고작) 8만 명분을 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팍스로비드는 증상발현 닷새 이내 들어가야 하고, 24시간 이내 투약하면 훨씬 더 효과가 좋다"며 "처방이 잘 이뤄지지도 않고, 배급도 잘 안 돼 재고가 남아돌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처방기관과 대상 확대에 따라, 사용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맞다. 방대본에 따르면, 이달 첫 주 일평균 1286명(총 9003명)이 처방받은 팍스로비드는 둘째 주 2405명(총 1만 6832명)으로 늘었고, 지난 주 기준으로는 5642명(총 3만 9494명)까지 올랐다. 주간 사용량이 2주 만에 4배 이상 불어난 데엔 60만까지 폭증한 확진규모로 60세 이상 고위험 환자의 비중이 커진 배경이 작용했다.
방역당국은 현재 남은 팍스로비드도 '2주'면 동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머크앤드컴퍼니(MSD) 사의 경구용 치료제인 '라게브리오'(성분명 몰누피라비르)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 위원장은 "하루에 고위험군이 (전체 환자의) 20% 가까이 나오고 있는데, 처방만 제대로 된다면 (지금의 재고량은) 이틀이면 다 쓸 수 있는 양(量)"이라고 언급했다.
'부작용 우려' 동네 병원, 처방 꺼려…"藥 기전 상 처방 까다로워"
전문가들은 재택치료를 받는 '집중관리군' 환자들을 모니터하는 동네 병·의원에 팍스로비드 처방을 꺼리는 기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집중관리군은 60세 이상 및 기저질환자 등으로 정부가 지정한 관리의료기관으로부터 '하루 2회' 비대면 모니터링을 받고 있다. 전날 기준 전국의 집중관리군 환자는 27만 4562명에 이른다.이들에게 전화상담과 처방을 제공 중인 동네 병원은 이비인후과와 내과·가정의학과 등 종전에 코로나19 확진자를 진료한 경험이 없는 의료기관이 상당수다. 신약인 팍스로비드의 기전과 용법에도 익숙치 않다는 뜻이다.
천 교수는 "개인 병원들에서는 팍스로비드 처방을 잘 못하고 있다. 원래 본인이 보던 환자가 아닌 경우도 많다 보니 환자가 (일부러) 요구하지 않으면 약을 안 준다는 거다"라며 "개원의들이 약 처방을 보수적으로밖에 할 수 없다 보니 중증이 이렇게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택환자를 맡는 이비인후과·내과 등은 평소 약을 많이 안 쓰는 과(科)들이다 보니 부작용에 대해 두려움이 굉장히 많다"며 "환자가 치료제를 요구하면 '이 약을 써서 문제가 생겨도 감수하겠다'는 공지를 하고 있다더라. 그럼 환자들이 약을 받으려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신장·간 기능이 좋지 않은 기저질환자들의 경우, 병용금기 약물이 20여 개에 달하는 만큼 처방 자체가 고도의 의학적 판단을 요한다는 점도 하나의 장벽이다.
신 위원장은 "팍스로비드의 성분은 에이즈 치료제인 '칼레트라'와 다르지 않다. 저 같은 감염내과 의사도 에이즈 환자한테 칼레트라를 쓰려고 하면 따질 게 굉장히 많아서 골치가 아프다"라며 "만약 잘못 처방해 문제가 생기면 (의사)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처방이 결코 쉽지 않은 약"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1차 의료기관에 '소극적 처방'의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라고도 봤다. 신 위원장은 "팍스로비드를 쓸 수 있는 과는 누가 봐도 감염내과밖에 없는데 정작 주변의 감염내과 의사들은 태반이 '쓰려고 하면 약이 없다'고 한다"며 "서로 영역이 다른데, 산부인과 의사에게 외과 수술을 맡기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고위험군에게 적시에 투약이 이뤄지려면 절차가 최대한 간편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다.
신 위원장은 "결국 이런 처방을 잘할 수 있는 감염병전담병원이나 대학병원 등에서 고위험군에 사용할 상황이 됐을 때 빨리 약을 쓸 수 있도록 병원들이 약물을 직접 확보하고 있다가 바로 약을 받아갈 수 있게 예외를 둬야 했다"며 "요양병원의 원내 처방을 지금이라도 허용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천 교수는 "요즘은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처방대상에 해당되면 무조건 보건소에 연락해 '약을 달라' 하시라고 교육시킨다"며 "재택치료 환자들에 대한 처방에 좀 더 신경을 쓰던가, 아니면 대학병원·종합병원 등에서 의사가 보던 환자들에게 팍스로비드를 처방할 수 있게 외래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체재'로 라게브리오 내세우는 정부…전문가들은 "글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늦어도 내일(24일) 라게브리오의 긴급사용을 승인할 예정이다. 정부는 사용허가가 나는 대로 이번 주부터 10만 명분을 도입할 계획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라게브리오의 임상 효과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다. 실제로 미국 FDA(식품의약국)에 따르면, 라게브리오가 고위험군 환자의 입원·사망률을 낮추는 비율은 약 30% 정도로 팍스로비드(90%)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임신부 등에 대한 안전성 문제도 수차례 제기됐다.
신 위원장은 "라게브리오는 중간보고 때 50% 가까이 효과가 있다고 하다가 최종에는 30%로 떨어졌는데, (시험대상에) 나중에 포함된 사람은 위약보다도 효과가 낮은 것으로 나왔다. 치료효과가 굉장히 의문스럽다"며 "기본적으로 DNA 복제를 건드려서 남성 같은 경우 복용 시 3개월 동안 피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 교수도 "라게브리오가 들어와도 개인적으로는 쓸 계획이 없다"며 "차라리 (주사형 치료제인) 렘데시비르가 훨씬 낫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팍스로비드 추가도입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효과가 검증된 치료제를 적극 확보해 더 많이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천 교수는 "약 하나에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게 말이 되나. 정부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사망자를 지금의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며 "정부가 어떤 외교적 노력을 총동원해서든 팍스로비드를 지금 구해와야 한다. 환자를 다 잃고 4월이 지나 가져오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신 위원장 역시 "약은 재고를 쌓아둘 게 아니라 있는 족족 바로 써야 의료시스템의 부하를 줄일 수 있다. 팍스로비드는 임상시험에서도 위약군에서 부작용이 더 많이 나왔을 정도로 안전성이 입증된 약"이라며 팍스로비드 조기도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