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안의 경우 심의위를 거치게 된다. 심의위에서는 심각성, 지속성, 고의성, 반성 정도, 화해 정도에 대해 각각 0~4점으로 점수를 매겨 가해학생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는데 합계 점수가 클수록 대체로 조치는 무거워진다. 여기에 가해학생의 선도 가능성과 피해학생이 장애학생인지 여부 등을 경감 요소로 반영해 최종적으로 가해학생에게 1~9호까지의 조치가 내려지게 된다. 심의위에는 전·현직 교원 및 교육전문직원, 학부모, 외부 전문가 등이 임명·위촉돼 참여한다.
5가지 판단 요소, 0~4점으로 점수화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 근거로 활용
'반성·화해 정도'도 판단 요소에 포함
이 같은 세부 요소와 판정 방식이 마련된 데는 기존보다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해 유사한 사안에 대해 유사한 조치가 내려지도록 하고,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이 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사이에 둔 갈등이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실정이다.
최근 대전의 한 고등학교 학생 간 학교폭력 사안에서도 요소별 판정 결과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지난해 11월 A군은 B군으로부터 폭행을 당했고, 관계는 현재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당사자들은 물론 보호자 간에도 갈등의 골이 오히려 깊어진 상태가 됐다. 심의위에 출석한 A군과 가족은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A군 측에 따르면, 심의위에서 이 사안에 대한 '화해 정도'는 '화해 정도가 매우 높음(0)-높음(1)-보통(2)-낮음(3)-없음(4)'의 5단계 가운데 '보통(2점)'으로 판정됐다. 실제 화해된 수준보다 점수가 낮은 게 아니냐는 것이 피해학생 측의 주장이다. A군 측은 "다른 요소들의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화해라는 것은 피해자도 그렇게 느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화해는커녕 관계가 더 악화된 상황인데 기준이 무엇이냐"고 반발했다. 피해자도 공감해야 할 '화해'라는 기준에서 피해자 측의 생각과 동떨어진 결과에 대해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A군 측은 심의위에 B군이 쓴 '사과편지'가 제출된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소속 학교 등을 거쳐 심의위에 전달된 B군 측의 사과편지는 20여 통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정작 A군은 받은 적 없는 사과편지"라는 설명이다.
피해학생 측은 "이 같은 판정이 어떻게 내려진 것인지 심의위가 열린 교육지원청에도 물었지만 '심의위를 믿으라'는 답변만 받았을 뿐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가해학생에 대한 조치 결정마저도 신뢰하기 어렵게 됐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학교폭력 피해를 겪은 C군의 경우 심의위에 가해학생의 반성문이 제출됐고 당사자 진술 등을 통해 가해학생의 반성 정도가 '높음'으로 판정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또 다시 같은 학생에 의한 학교폭력 피해가 불거지며 다툼의 과정을 거치게 됐다.
A군 사안에 대한 심의위가 열린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전문성을 가진 위원들이 양측의 진술과 자료를 모두 종합해 결정하며, 조치 결정의 이유에 대한 설명은 전달된 통보서를 통해 갈음한 부분"이라며 "행정심판과 같은 불복 절차도 안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통보서에 명시된 조치 결정의 이유에는 학교폭력으로 판단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피해학생 측이 듣고자 했던 각 요소별 설명은 포함돼있지 않은 상태다.
심의와 관련된 교육부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청 관계자는 "개별 사례들을 살펴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전문성을 지닌 심의위원들이 모여 피해 측과 가해 측을 모두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자료 등을 충분히 검토한 뒤 합의해서 판단한다"며 "위원들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고 좀 더 객관적으로 심의할 수 있도록 교육이나 연수를 교육청과 협의해 계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악화됐는데"…'화해 정도' 판정 결과 온도차
피해학생 측 "기준 물었지만 심의위 믿으라는 말만"
'반성 정도 높음' 가해학생, 학교폭력 재발 사례도
현재의 심의 과정과 기준은 그간 결과를 둘러싼 분쟁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개선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는 현장과 전문가들은 이 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맹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먼저 '조치 결정' 자체에 비중이 실리면서 그에 이르게 된 과정과 이유에 대한 상호 이해와 소통의 과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하면서 불복하는 비중도 높고 심의 이후 사안이 매듭지어지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학교폭력 문제는 기준을 아무리 구체화해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점이 너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양측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데 한계가 있고, 교육적 목적도 있기 때문에 결과가 소위 사법적 잣대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심의 결정에 대한 통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지는 이유 등에 대해 심의위에서 피해학생이나 학부모 등과 충분한 대화 과정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임재연 목원대 교수 역시 "심의 과정에서 진술할 기회는 주어지는 반면, 결과가 나온 이후 이에 대해 묻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은 문제로 여겨진다. 행정심판 등의 불복 절차가 있지만 이는 또 한 번 당사자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라며 "어떤 결과가 나오고 왜 이 같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 피해자와 보호자, 심의위원장 간에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학교폭력 심의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서 "학교폭력의 심각성·지속성·고의성은 이미 일어난 일로서 바꿀 수 없지만, 반성 정도와 화해 정도는 바꿀 수 있는 부분"이라며 "피해학생에게 사과편지나 문자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내고 주기적으로 보냈다는 점을 강조하라"는 조언이 나오기도 한다.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선 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실제 심의위 단계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반성과 화해 등이 제대로 오갈 수 있는 중간 역할과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도 전문가들은 말한다.
임재연 교수는 "반성·화해 정도 등의 요소가 심의에 들어간 것은 그만큼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취지지만,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며 "사실 심의위 단계까지 가는 상황에서 양측 스스로 화해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만큼 실제로 반성이나 화해를 비롯해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의 마련과 역할이 학교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우성 경기수원교육지원청 학교폭력전담 장학사는 덴마크 프리스홈 학교에서 시행하는 '36시간 법칙'을 소개했다. 학교폭력 사례가 발견되면 36시간 내에 교사와 가·피해학생의 부모가 만나 대화를 실시하는 것이다. 조기에 이뤄지는 상호 소통을 통해 갈등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36시간 법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남기 교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해학생에게는 변화의 토대가, 피해학생에게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돼야 하지만, 현실은 점수화해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리다 보니 가해학생 입장에서는 벌을 줄이려는 데 초점을 두게 되고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나는 이 조치를 이행했으니 책임을 다 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며 "한편으로 현장에서는 주어진 시간 내 많은 건들을 해결해야 하는 고충들도 있는데 '예방'과 실질적 '갈등 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와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